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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 병산서원

오 베로니가 2017. 4. 27. 12:18



오래전에 왔던 안동,  도산서원은 그 때 갔었으므로 이번엔 화해마을을 가기전에 병산서원을 먼저 가기로 하고

하회마을 삼거리에서 시작되는 병산서원 가는 길은 흙먼지 폴폴 나는 비포장 길로써 4km정도 된다. 

옛정취를 훼손한다고 포장을 미뤄 오던것을 이제 포장이 시작되었다. 

버스는커녕 승용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만큼 좁은 산길이다. 하루 2대의 버스밖에 다니지 않는 비포장 길이지만, 서원으로 가는 길은 오랜 세월 동안 강줄기가 만들어낸 퇴적과 침식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물이 휘어져 돌아가며 끊임없이 안쪽에 모래를 쌓고 반대쪽으로는 산을 깎아 넓은 백사장과 병풍 같은 절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외삼문 복례문 앞에는 10~20그루의 목백일홍과 노송들이 심어져 있고, 더 나아가면 폭 150여m의 백사장이 펼쳐진다. 이어 폭 100여m의 낙동강이 있고 

반대쪽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병산이다. 뒤로는 화산을 두고 있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에 있는 조선 중기 서원.


안동 병산서원서애 류성룡 1542~1607년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류성룡은 본관이 풍산으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도승지·예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시에는 영의정으로 왕을 호종하고, 성곽 수축·화기 제작을 비롯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으며,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1598년(선조 31) 북인들의 탄핵으로 한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을 쓰는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문장·덕행·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지역 후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병산서원은 원래 안동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풍산류씨의 교육기관이었다. 1572년(선조 5) 류성룡이 현 위치인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로 이건하였다. 1607년(선조 40) 류성룡이 세상을 떠나자 후학들이 1614년(광해군 6) 존덕사를 세워 류성룡의 위패를 봉안하고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류성룡의 위패를 여강서원으로 옮겼다가 1629년(인조 7) 다시 현 위치로 옮겨와 주향하고 있다. 병산서원철종 때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건립 당시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병산서원 앞에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물은 그 오랜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변함이 없다.



                                                   늦게 물이 오르는 배롱 나무는 아직도 한겨울인 줄 안다.

                             서원 둘레에 배롱나무가 많아 여름에 꽃이 필 때 오면 서원과 어우러져 무척 아름다울것 같다.



박태기 꽃이 활짝 피어 서원의 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에 무익공(無翼工) 3량 팔작지붕으로 꾸민 누각이다.
휴식과 강학의 복합 공간이었다.  200여명을 수용하고도 남을  장대한 누각은

다른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움이 있다.

만대는 두보의 시"백제성루"  중 푸른절벽은 저녁무렵 마주하기 좋으니 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동재와 서재는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은 대칭적 구성의 건물로 각기 정면 4칸, 측면 1.5칸 크기의 납도리 5량가 맞배지붕이다.

서재는 동재와 달리 큰방 앞과 대청 뒤의 쌍창이 오래된 기법인 영쌍창으로 되어 있다.





                      


                      

                                            

                                                  서원 뒷편에 자리 잡은 존덕사는 서애 유성룡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