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행궁
사적 제478호. 행궁은 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지칭한다. 화성행궁은 화성 안에 건축된 행궁으로,
정조가 융건릉에 능행할 목적으로 건축하였다.
화성행궁의 규모는 전체 557칸으로 다른 행궁에 비해 현저히 크며 정조 20년(1796)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로 마련된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다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봉수당(奉壽堂)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부왕 장조(莊祖:장헌세자)의 능침(陵寢)인 화산릉(華山陵)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행궁에서 쉬어갔다. 당시에는 봉수당(奉壽堂)과
경룡관(景龍館)·복내당(福內堂)·유여택(維與宅)·노래당(老來堂)·신풍루(新豊樓)
·남북군영·강무당(講武堂)·무고(武庫)·수성고(修城庫)·집사청(執事廳)·서사청(書史廳)
·비장청(婢將廳)·우화관(于華館)·득중정(得中亭)·행각(行閣)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화성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에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훼손되고 낙남헌(洛南軒)만 남게 되었다. 봉수당의 원래 이름은 정남헌인데,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경의왕후)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푼 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봉수당으로 불렀다. 낙남헌은 봉수당 북쪽에 있던 ㄱ자 건물인데 노래당과 함께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된 초익공(初翼公) 양식의 팔작지붕집인데,
지금은 꺾인 부분이 잘리어 없어지고 一자형의 건물로 바뀌었다.
1975년 화성 복원 결정과 함께 행궁 복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수원시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복원공사를
시작하였고, 2003년 7월 말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을
완료한 1단계 공사가 끝났다. 이어 10월 9일 화성행궁 21개 건물 중 18개 건물과
정조의 영전(影殿)인 화령전 등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개관식을 가졌다.
2010년까지 이어질 2단계 사업에서는 신풍초등학교가 위치한 우화관과 맞은편에 위치한
별주, 내포사 등 화성행궁의 나머지 3개 건물 94칸과 행궁담장 등을 복원하여
세계적인 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두산백과에서 옮김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
봉수당에서의 진찬연
1795년 을묘원행 시 진찬연 장면은 부분 연출한 공간으로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예를 드리고 있고 여관 < 女官> 들은 왕과 혜경궁 홍씨를 보좌하고 있다.
이날 진찬연에서 혜경궁 홍씨에게 12기의 소별미와 70가지의 음식, 그리고42개의 상화가 바쳐졌다.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랑문에서는
'빛나는 궁월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이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라고 하였다.
화령전 [華寧殿]
화령전 운한각 내부에 모셔진 정조대왕 어진. 군복을 입고 있다.
화령전은 1800년 6월28일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 정조대왕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봉안각이다. 정조대왕의 초상화는 평생 세차례
그려졌는데 화령전에는 융복(군복)입은 초상화를 모셨다. 화령전은 화성에서
'화'자를 따고, 사서삼경의 '시경'에서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는
귀령부모'에서 '령'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곧 화령전은 국왕 순조가 화성에 묻힌 선왕 정조를 찾아가 문안을 여쭙는
전각이었다. 정조의 사당인 이 곳에서는 역대 국왕이 현륭원과 건릉을 다녀
갈 때마다 제향을 올렸으며 현재의 초상화는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한 것이다.
화령전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은 정종의 어진을 봉안한 정전, 화재나 홍수 등
만약의 사태가 났을때 정종의 어진을 옮겨 모시는 이안청, 그리고 국왕 및
제사를 모시기 위해 화령전에 온 관리들이 몸을 깨끗이 하고 대기하는 재실,
화령전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전사청 등이 있다.
정리소는 장차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정조 20)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 하였다
낙남헌
1795년(정조 19) 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군사들에 대한 호궤(호饋 : 군사들을
배불리 먹임)를 이 곳에서 하였으며, 수원 향교의 문선왕묘(文宣王廟)를
배알한 후 이 곳에서 별시(別試)를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방방(放榜)]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낙남헌에서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한 양로연(養老宴)을 시행하였
다. 낙남헌에서의 양로 잔치는 혜경궁의 회갑연인 만큼 당년 61세인 수원부의
백성은 모두 참여토록 하였으며 문관, 음직, 무관 및 본부 경내에 있는
조관(朝官)으로 70세 이상인 사람을 참여 대상으로 크게 확대하였다.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곳곳이 배어 있는 행궁을 둘러 보면서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비운이 가슴을 할퀴고 스쳐간다. 권력다툼의 희생물이된.
그러니 그의 아들 정조의 마음을 어떻게 글로 표현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