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성지순례 250524
우리 성당 1구역은 서울교구 도보성지순례 2길인 생명의 길을 순례하기로 하고 개봉역에서
8시40분에 만나 가회동 성당으로 출발했다. 가회동 성당이 이번 순례길의 출발점이다.
선조들이 신앙의 씨를 뿌리고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모진 박해를 받으면서 순교하게된 흔적을 찾아 순례하는 길입니다.
출발 ; 가회동성당 - 한국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 터 - 형조 터 - 의금부 터 - 전옥서 터 -
우포도청 터 - 경기감영 터 -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 중림동 약현성당.
가회동성당이 위치한 북촌 일대는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하여 1795년 4월 5일 부활 대축일에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집에서 조선 땅에서의 ‘첫 미사’를 집전한 지역이다. 본당 관할구역은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사목활동을 펼쳤던 지역으로서 한국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식으로 본당이 된 것은 1949년이고, 이후 1954년에 성전이 완공되었다. 하지만 성전이 낡아 2011년부터 옛 성전을 허물고 현재의 새 성전을 짓게 되었다. 2013년 11월 21일 준공되었고, 준공 3일 후인 24일(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입주하여 입주 미사를 봉헌하였다. 현재의 동서양 건축양식이 어우러진 새 성전은 과거의 역사를 되살리고자 2014년 4월 20일 부활 대축일에 서울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님에 의하여 축성되었다. (출처 : 가회동성당 홈페이지)
역사 전시실
1794년 조선에 밀입국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이듬해(1795년) 부활절(4월 5일)에
역관 최인길(마티아)의 집(바로 이곳 가회동 성당 자리)에서 조선인 신도를 모아놓고
최초의 정식 미사를 봉헌하였다
왼쪽부터 최인길 마티아, 주문모 야고보, 강완숙 골롬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내시는 선조들의 모습에서 나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 조차도 죄일 것 같아 조용히 마음 속으로 회개한다.
주님 !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미사 시간에 맞추어 가지 못해 미사 봉헌은 할 수 없고 텅빈 곳에서
기도만 올렸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못가더라도 이번 서울 도보성지순례에
참석할 수 있음에 감사 기도를 드리고 오늘 순례길에 만나는 순교하신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드린다.
파이프 오르간에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 나올 것 같은 엄숙함이 부럽다.
우리 성당 오르간이 수명이 다 해서 파이프 오르간으로 바꾼다고 했는데 ...
♤ 고종의 자녀들 천주교 입교
고종의 다섯 째 아들인 의친왕(이강)은 1955년 8월 9일 안국동 별장으로 찾아온 가회동본당의
보좌신부인 박병윤 토마스에게 병석에서 세례를 받고, 그 일주일 후 사망하였다
(대부 : 장면 부통령, 세례명 : 비오)
의친왕비(김덕수)도 의친왕이 사망하기 하루 전에 가회동 성당에서 세례(세례명 : 마리아)를 받았다
가회동성당을 나서면 아름다운 북촌의 길과 마주한다.
들어가 보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오늘은 순례길에 충실하기로..
이제 광화문을 지나면서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 터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된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세 번째로 열리는 시복식이었다.
1925년, 1968년의 시복식은 모두 이탈리아 로마 < 바티칸 >에서 열렸다.
통상 시복식은 바티칸에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추기경이 교황을 대리해 거행해왔으나
그때에는 교황이 직접 순교자의 땅을 찾아 시복식을 거행하는 감격스러운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때 나는 성당 봉사를 하는 때여서 광화문 광장에서 하는 시복식에 참석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차 타고 오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앞.
형조터
- 조선시대 법률, 소솔, 형벌등을 관할하던 관청이며 수많은 교인들이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며
순교의 길을 걸었던 장소(신유,기해,병인박해)
세종문화회관 사거리에서 종각 쪽으로.
의금부 터.
-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던 일을 맡아 보던 관청으로 일반 평민이나 신분이 낮은 이들보다는
주교와 신부, 평신도지도자들이 국왕의 명령에 따라 국문을 받았던 곳이다.
전옥서 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41 (서린동 33)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도로쪽 화단
전옥서를 감옥이라고 하였지만 '감옥'은 근대에 도입된 단어이고 조선시대에는
그냥 '옥(獄)'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옥(獄, 典獄) - 구한말 및 대한제국 시기 감옥(1894년) - 일제강점기 형무소(1923년) -
현대 교도소(1961년 이후) 순서로 감옥 명칭이 변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가둬두는 교도소 개념의 형벌이 없었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의 감옥이 아니라
판결이 확정되기 전의 죄수(미결수)를 수감해 두는 일종의 구치소에 가까웠다
높은 돌담으로 둥글게 쌓은 원옥(圓獄)과 부군신당, 옥졸들의 숙직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원옥은 장방형의 동, 서옥사(獄舍)가 있었는데 동쪽은 남자죄수들,
서쪽은 여자죄수들을 수감하는 곳이다
또 감옥을 세 칸으로 나누어 죄수들의 죄(罪)에 따라 나누어 수감하였다
103위 성인 가운데 전옥서에서 순교한 성인은 이호영 베드로와 김 바르바라이다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이소사 아가타 성녀의 동생으로, 1835년 이소사와 함께 체포되어
1839년까지 4년 동안혹독한 옥살이로 얻은 병으로 순교하였다
김 바르바라 성녀도 포도청으로 끌려가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고, 전옥서에서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순교하였다
우포도청 터
포도청은 중종 무렵에 설치돼 1894년 (고종31년) 갑오경장 때
좌우포도청을 폐합해 경무청을 설치 하기 전까지 350여년 동안 존속했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 순교 터이자 최대 신앙 증거터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다
우포도청은 김대건 신부 치명 순교길로 알려져있다
김대건신부 치명 순교길은 2018년 교황청이 국제순례지로 선포한
' 천주교 서울 순례길'에 속해있는 길이다
우포도청 터와 서소문 밖 네거리,당고개,절두산,새남터 순교성지 등이다
이곳들은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처형장으로 압송되면서 거쳐 간 곳이다
종각 쪽에서 돌아 덕수궁 옆 성공회 성당.
덕수궁 정문에서는 수문장 교대식이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물도 마시면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숨을 고르고 서소문 쪽으로 다시 걷기 시작한다.
기억해야할 중요한 자리이지만 우리 모두 그냥 지나친다.
유심히 살피지 않고 관심이 없으면 그럴 수 있다. 이번 도보성지순례로 인해
관심을 갖고 지나는 길에 잠시 묵상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784년 가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일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을 당했다. 정조(1776~1800년) 사후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1873년)를 거치는 동안 순교자들은 칼 아래 참혹하게 스러져갔다. 즉,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의 신분제 사회에 맞서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서로 사랑할 존재임을 증거한 순교자의 터가 된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신유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 명례방 회장이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그의 장남 정철상 가롤로, 성호 이익의 제자로 녹암계③를 형성한 권철신 암브로시오, 평신도 회장 최창현 요한과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가 순교하였고, 기해박해 때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이자, 정약용의 조카인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누이 정정혜 엘리사벳, 북경을 오가며 성직자 영입 운동에 크게 공헌한 조신철 가롤로, 허계임 막달레나와 그녀의 큰 딸 이정희 바르바라, 둘째 딸 이영희 막달레나,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권희 바르바라, 남명혁 다미아노 등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병인박해에 이르러서는 흥선대원군의 승정원 승지였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초 신학생 중 한 명인 최방제 프란치스코의 형 최형 베드로, 전장운 요한이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쳤다. 이중 이영희 막달레나, 이정희 바르바라, 허계임 막달레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형 베드로 다섯 분의 성인 유해는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 모셔져 있다.
서소문 역사공원을 지나면서 언덕위에 순례길의 마지막 성지 약현성당으로 오른다.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어 신자가 늘어나자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Marie-Jean-Gustave Blanc 白圭三 1844~1890)가
1887년 서울 중구 순화동 지역인 남대문 밖 수렛골에 집 한 채를 마련해
교리 강습을 위한 강당을 차린 것이 약현성당의 시작인 약현공소이다.
1890년에는 약현공소 관할 신자가 950명으로, 종현본당(현 명동성당)의
586명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에 종현본당의 두세 신부(Camille-E. Doucet 우리 이름 정가미 丁加彌)는,
8대 교구장 뮈텔 주교의 허락을 받아,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신앙 선조들이 순교한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매입해 1891년 10월 27일 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동시에, 약현공소는 본당으로 승격, 두세 신부가 11월 9일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약현성당은 서울에서 2번째, 전국에서 9번째로 설정된 성당으로 기록되었다.
1892년 프랑스인 신부 코스트가 설계·감독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축물로, 순수한 고딕 양식은 아니지만
벽돌로 된 고딕 성당으로 후세의 한국 교회 건축의 모범이 되며,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천주교 박해 시대에 수많은 순교자를 낸 서소문 밖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 있다는 장소의
역사성으로 한국 천주교회사와 건축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톨릭 출판사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에 위치한 성당.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성당으로,
사적 제252호(1977년 11월 22일 지정)이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에서도 천주교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성당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는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많은 신앙 선조들이 순교한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을 매입해
약현성당(중림동 성당)을 지었다. 주보성인은 나자렛의 성 요셉이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랑스인 외젠 코스트 신부(Eugene-Jean-Georges Coste, 파리 외방전교회)가
명동성당의 설계의 핵심을 담아 1891년 10월 건축을 시작,
착공 1년 만인 1892년 11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벽돌집 성당이 준공되었으며,
1893년 4월 축성식을 가졌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이 1887년 5월 부지 매입을 마치고,
그 해 겨울부터 부지 정지 작업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건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1892년 5월에 기공식, 1898년 5월 축성식을 가져 축성 순서로만 보면
약현성당이 명동성당에 앞선다. 당시에는 명동성당이 한양도성 내의 사목,
약현성당이 한양도성 외의 사목을 분담하였다. 즉, 현재 서울대교구 내 본당 대부분은
명동성당이 아닌 약현성당에서 갈라져 나온 본당들이다.
가까이 가톨릭출판사, 서소문 성지역사 박물관, 가톨릭대학교 음악대학원 (최양업홀)이
자리잡고 있다.
교황청으로부터 아시아 지역 최초 국제 순례지로 승인 (2018년 9월 14일) 받은
천주교 서울 순례길 생명의 길(2코스)의 도착지이며, 일치의 길(3코스) 출발지이다.
먼 길을 걸어 몸은 지치고 힘들었지만 해냈다는 충족함이
모든 피로감을 걷어내고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은 날아갈듯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