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흐***슬픈 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의 생애

2010. 5. 29. 00:13그림

 

 

슬픈 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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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아버지
Theodorus van Gogh (1822~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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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어머니
Anna ornelia van Gogh-Carventus (1819~1906)

1869년 7월 숙부의 권고를 받은 빈센트는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판화와 복제화를 파는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빈센트는 열성적이고 세심하며 유능한 직원이었고, 칭찬받을 만한
모범 청년이었다.
헤이그 시절은 그의 삶에서 가장 밝은 시절이었다.
1872년부터 아우인 테오가 화랑에서 함께 일하게 되자 빈센트 는
몹시 행복했다.
그해 8월 학교를 다니다가 일시 귀향한 테오에게 보낸 짧은 편지를
쓴 것이 그 후 그들 사이에서 평생을 두고 오간 편지의 시작이었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하지.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왜 창공 위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나는 갈 수 없는 것일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등은
천상의 운송수단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그는20살 때부터 인생의 갖은 좌절을 맛본다.
하숙집딸 로젠니 로이어에게 구혼했다가 거절 당한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 첫번째 좌절이었다.
22살, 그는 기독교 단체에 미술품 거래를 혐오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 당한다.
25살이 된 고흐는 신학공부를 하다 그만두고 전도사로 벨기에의 보리나주로 간다.
그는 지하갱도 300m에서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고흐는 일주일에 몇명씩 죽어나가는 비참한 이곳에서 전도를 하기 보다는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도왔다.
보리나주의 탄광을 소재로 소설을 쓴 에밀 졸라는 소설 속에서 그를 젊은 예수라 묘사했다.
고흐는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것을 나눠 주었다.
하지만, 그의 전도사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품위를 떨어트린다는 이유로 1년만에 전도사 직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양배추와 감자가 있는 고요(1881년 12월, 이튼.판넬의 종이
( Amsterdam, Van Gogh Museum )

26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데생기법 책과 물감을
부탁한다. 전업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고흐는 헤이그, 그렌트 등지에서
거의 독학으로 수업하며 그림들을 그렸다.
하지만, 정식 그림 수업을 받지 못한 그의 그림은 데생이나 색채 쓰는 데서
기초가 되어 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고흐의 동생 Theo
구필화랑의 유능한 화상이었던 동생 테오는 고흐에게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고 매달 고흐에게 돈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동생으로 부터 받는 돈은 평생동안 고흐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고흐는 죽는날까지 테오에게 668통의 편지를 보냈다.




고흐의 드로잉

아무도 그의 그림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여인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28살 때에는 이종 사촌인 케이에게 구혼 했지만 거절 당했고,
아버지와 친척들에게 근친상간을 하는 놈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이사건으로인해 그렇지않아도 문제아 취급 받던 그는 가족을 포함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 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29살에 고흐는 헤이그에서 알콜중독자에 매독 환자였고 임신중이었던
매춘부 씨엔을 만나게 된다.
고흐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동거를 시작한다.
이즈음, 고흐와 고흐 가족간에는 건널수 없는 골이 생겨졌음을
고흐가 쓴 편지에서 알 수 있다.





"부모님은 덩치만 크고, 털투성이의 지저분한 개를 집안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나를 집에 들이는걸 꺼려한다.
그들이 계속 개를 집에 두는 이유는 그개가 좋아서가 아니라
억지로 참고 있을 뿐임을 개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개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개로 남아있을 것이고, 가난 할 것이고,화가가 될 것이다."

- 1883년 12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씨엔
씨엔과의 생활은 비참했다.
테오가 보내주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고흐는 방세를 내고,
땔감을 사고 물감도 사야 했다.
몇일이고 굶어야 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결국 고흐는 씨엔과 결별하고 부모의 집으로 돌아 온다.
뇌넨 목사관, 이곳에서 고흐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누에넨의 교회(1884년 10월, 누에넨 . 오일 캔버스.
Amsterdam,Van Gogh Museum,Netherlands)
누에넨에서 머무는 2년동안 200여점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림의 대상은 뇌넨의 풍경, 그리고 늘 애정을 가져왔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초기 대표작 감자 먹는 사람들..
이시기 누에넨에서 수십번 반복된 작업끝에 그려졌다.
고흐는 아름답고 이상화된 시골 풍경 보다는 거친 손마디를 가진
농촌사람들의 힘든 일상을 영원히 남을 그림으로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흐의 편지
고흐의 평생 경제적 후원자는 그보다 4살 아래의 동생 "테오"였다.
고흐는 고향에서나 타지에서나 한푼의 돈도 벌지 못하는 무능력자였고
변변한 친구도 없어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아야했다.
그에게 남은 것을 외로움과 그림 뿐이었다.
이후 5년 동안 벨기에의 안톤, 그리고 파리를 거치면서 가난한
그의 그림수업은 계속됐다.




고흐 -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1887년 여름, 파리.


1885년 파리에서 그는 자신의 그림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것은 바로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화상으로 성공한 동생
테오를 통해 고갱, 모네, 로트렉,피사, 드가등 인상파 화가들을 만난것이다.
고흐는 인상파 그림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그림에서는 빛과 공기가 만져졌다. 무엇보다도 인상파 화가들은
고전 회화 기법을 깨고 주관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그린 최초의
화가들이었다.
인상파와의 만남을 계기로 고흐의 그림은 획기적으로 바뀐다.
어두웠던 그림은 점덤 밝아 지기 시작한다.


고흐 - < A Woman Walking in a Garden > (정원을 거니는 여인) 1887.7 Paris

고흐는 꿈의 실현을 위해 자신이 먼저 "아를"에 가서 몇명의 화가를
불러 모은다. 하지만 고흐의 설득에 응답해주는 사람은 오직 고갱
한 명뿐이었다.고흐는 작품을 그리면서 고갱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이시기에 그린 작품 중에는 오늘날 인기있는 알려진 작품이 많다.

고흐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와도 같은 마음으로 고갱을 기다리며
그가 거처할 방에 걸기 위한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게 된다.
고흐는 술꾼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압생트"를 매일매일 마셨고
이 술의 부작용으로 황시증이 생기게 된다.
시립병원의 의사 "레이"가 고흐에게 지나친 음주를 나무라자
고흐는 이렇게 말했다.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오 ...... 올 여름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나로서는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오."

찬란한 노란 색을 얻기 위해 여름내내 취해있었다는 것이다.
고갱은 10월 23일 , 아를에 도착하게 되고,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를
보고 감탄을 하게 된다.



고흐 - 씨뿌리는 사람 1888년 6월, 아를르.



고흐 - 노란집 - 1888년 9월
고흐는 고갱을 맞이하기 위해 집을 하나 얻고 그 벽을 노란색으로 칠한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그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앙금이 생기게 된다.
"아를르"에는 "반 고흐"가 항상 고맙게 생각하는 몇몇 동네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한명이 "드 라가르 까페"의 주인인 "지누"부인이었는데
고흐와 고갱은 지누부인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다.
그녀는 손님이없는 오전시간을 택해 모델을 하게 되는데
이때 고흐는 방안에서 책을 몇권 들고와서 부인 곁에 놓게 된다.
고갱은 매우 못마땅했다.
'술집 여주인을 그리는데 옆에 누더기책은 왜 갖다놓는가?'
고흐는 아랑곳하지 않고 45분만에 그림을 완성한다.



고갱 -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 1888
고갱은 이 그림을 그린 후 자신과 고흐의 우정을 기념하는 작품이라했지만
고흐와 고갱은 점점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급기야 고흐가 고갱에게 술잔을 던지는 일도 있게 된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날 고갱은 자신이 떠나겠음을 내비치고
고흐는 겨우 겨우 고갱을 달래보았지만 사이는 좋아지지 않는다.
고갱의 수기중 이런 귀절도 있다.
"...발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면도칼을 든 고흐가 나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내가 노려보니 그는 행동을 멈추고 달아났다."




달아난 고흐는 자기 귀를 자르게 된다.
고갱이 떠난다는 것을 강하게 반대한다는 동시에
"화가 공동체의 꿈"이 좌절되는데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고흐를 불안하게 여기던 주민들은 그를 경찰에 고발했다.
고흐는 3월 말까지 아를르 요양원에 감금 됐다.
그러나, 고흐는 이시기에도 끝임없는 그림에 열정을 보였다.




'아를르 요양원의 정원' 1889년 4월, 아를. 오일 캔버스.
Winterthur Collection Oskar Reinhart Switzerland
"이제 참을수 없는 환각은 사라졌고, 악몽을 꾸는 일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나를 바로 정신병원에 가둬 버리던지, 아니면,
온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수 있게 내버려 다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시작할때 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것이다.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보네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아니면 내 영혼을 주겠다."
-1889년 1월 ,귀를 자르고 한달뒤 쓴 편지




그림 17 : 고흐 - 실편백나무가 있는 밀밭 - 1889년 9월

고흐는 아를르에 있던 2년동안 간질 발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무려 200점의 그림을 그렸다.
요양원에 입원한 고흐는 다음날부터 실편백나무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실편백나무가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당시의 보편적
상식이었다. 다음은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중 일부이다.

"나는 해바라기 연작을 그린 것처럼 실편백나무 주제 연작을
그리려 한다.
왜냐면 아직 내가 보고 느낀 것 같은 실편백나무를 그린 화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이집트의 오베리스크처럼 아름답다"



그림 21 :고흐 - 구름낀 하늘아래 오베르의 밀밭 - 1890년 7월
이 그림은 그가 묻힌 공동묘지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라고 한다.
1890년 5월 27일, 고흐는 권총자살을 시도하며 37세라는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0년 동안의 작품활동에서 1만 6000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생전에 팔린 것은 단 한점 뿐이다.




고흐 - 붉은 포도밭 - 1888
이 그림은 고흐의 수많은 작품중 유일하게 팔린 그림이다.(400프랑)
그의 그림은 그가 죽고도 10년이라는 세월이 더 지나서야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죽으면서 오베르, 아를, 암스테르담 등, 자신이
거쳐 간곳에 선물을 주고 떠났다.
고흐는 자살을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고
식당에서 장례식을 치뤘다. 테오는 침울해 있었고, 장례식에 온 사람들에게
고흐의 추억이라며 고흐의 그림을 나눠 주었다.
6개월뒤, 고흐에게 동생이자 친구였던 테오는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33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고흐와 테오는 같은 곳에 나란히 묻혀 있다.
이리하여 고흐의 유작들은 모두 동생 테오의 미망인 요한나 반 고흐의
소유가 된다. 그녀는 남편 테오와 고흐사이에 오간 편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흐가 죽은 뒤 14년뒤 둘사이에 오간 편지들을 책으로출간되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여러 작가들에 의해 계속 소개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 고흐의 작품은 가격과 양 면에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 받기 시작했다.
Vincent - Don Mclean



빈센트 반 고흐의 유년시절

고흐는 가난한 네덜란드 시골의 엄격한 개신교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
Theodorus van Gogh (1822~85)와 외향적인 안나 오르넬리아 반 고흐-
카르벤투스 Anna Ornelia van Gogh-Carventus (1819~1906)사이에서
1853년 3월 30일, 맏아들로 태어났다. 고흐의 고향은 네델란드 북부
브라반트이다.
그가 태어나기 꼭 1년전에 태어난 형이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한 일이
있었는데 부모님은 그 형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다.
큰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그 슬픔을 지우지 못하고 Gogh가 태어난 후에도
매일같이 죽은 큰 아들의 무덤을 찾는다.
어머니의 애정이 부족함을 느낀 Gogh는 마음 한구석에 항상
슬픔과 울적함을 지니고 산다.

 

출처 : 人間의 條件
글쓴이 : 준호 할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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