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립미술관 / 천경자상설관

2017. 12. 6. 12:36전시회








1998년,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 천경자 < 1924~2015 >화백은

시민과 후학들이 자신의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60여년에 걸처 제작한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상설전시는  "영원한 나르시스, 천경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최근 몇 년간 미공개 되었던 작품을 중심으로 한

30여점을 선보인다.



전생에 자신은 황후였다는 여자가 있습니다.

소녀 시절에 스스로 지어 붙인 “경자”라

이름을 자신의 본명인 “천옥자” 앞에 두었지요.

그 뒤 그 이름은 인생의 아름다움과 슬픔, 외로움들을 신비롭게 표현할 줄 아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여류화가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어려서부터 독특한 감수성을 가지고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녀가 자랄 당시 대부분의 여자는 소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일제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천 화백은 교육과 문화에 열린 가정환경 덕분에

광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지요.

고등학교를 마칠 때 즈음 집안에 혼담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을 공부하고 싶었고 일본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물론 집안의 반대가 심각하였지요.

천 화백은 정신병자 흉내를 내면서까지 부모님께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랐습니다.

미친듯이 웃다가, 울기도 하고, 중얼거리면서 집안을 돌아다녔지요.

결국 부모님은 허락하셨고, 그녀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동경여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천 화백은

유학 중 만난 남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다시 신문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을 만났지만 곧 헤어졌습니다.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쉽지 않았던 인생의 고개들이

그녀의 가슴 속에 쉽게 식지 않는 예술혼을 잉태한 것입니다.

“나물 캐러 갔던 동네 소녀가 허리띠인 줄 알고 꽃뱀을 집으려다가

물려 죽은 일이 있었어요.

무서우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끌리는 그 장면이 어렸을 때부터 머리에 남아

언제가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지요.

그러나 내가 처음 그린 뱀은 꽃뱀이 아니라 한 뭉텅이의 푸른 독사였어요.”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맛보고

그녀가 자신의 삶에 저항하기 위해 택한 소재가 뱀이었습니다.

그녀는 전남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뱀에 대한 이미지를 탄생시켰습니다.

 

6.25로 인하여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천 화백은

그 곳에서 자신이 그린 뱀 그림 전시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젊은 여자가 뱀을 그렸다’면서 신기해하였구요.

그것이 “천경자”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한 것입니다.

또한 그녀의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이미지는 꽃과 여인입니다.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것이 꽃과 여인이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녀의 작품 속에는 아름다움이 주로 보여지고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외롭기도 하고 슬퍼보이기도 하지요.

고독의 미와 아픔의 성숙이 천경자의 예술을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던 1974년, 18년간 재직하던 홍익대 교수직을 버리고,

문득 천 화백은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남태평양과 유럽, 남아메리카까지 계속되었지요.

그곳을 돌아보고 그 여행에서 느낀 선명한 색감과 원시적 인상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반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보여졌던 안타까운 인간의 또 다른 모습들을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에 비추어서 그림으로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얼마 전이었던 1991년 천 화백은 힘든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의 “미인도”에 대한 진품 시비 사건 때문이지요.

천 화백은 끝까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하였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많은 감정사들이 그녀의 작품이라고 판결하였고,

입장이 난처해진 미술관에서도 천 화백의 작품이라 주장하였지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천 화백은 자신의 작품들을 서울 시립 미술관에 기증하고,

큰 딸이 있는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 뒤 진품 위조 사건은 범인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천 화백은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않은 채

지금도 스케치북을 옆구리에 끼고 중남미를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



                                                                        <  꽃무리 속에 여인  >


                                                        < 화병이 된 마돈나 >


                                                            < 그라나다 두 자매 >


                                                              < 내 슬픈 전설의 22 페이지 >

54세 때 그린 대표적인 자화상으로 22살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그린 작품이다.

" 내 슬픈 전설 " 이라는 말이 왠지 좋았다는 작가는 " 꽃이니 뱀이니 머리에 얹은 것도 한 " 이라고 말한다.

여인의 머리를 둘러싼 뱀은 고통스러웠던 시절 자신을 지켜주던 수호신으로서 존재한다..

짙푸른 음영이 드리운 커다란 두 눈에 젊은날의 슬픈 기억이 깃들어 있다.


                                                  < 여인의 시 1 >


                                                     < 여인의 시 2 >



                                        <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 >



                         환상의 드라마

                       "작품은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고 , 미래의 세계를 상상하며 오늘의 꿈을 담은 한 폭의 드라마들 "

  


                               

                                                                                 <  생태>

한국화단에 천경자의 존재를 각인시키게한 작품이자 가장 아끼는 작품이었다.

당시 실패로 끝난 첫 결혼과 가난, 두 두 혈육을 떠나 보낸 슬픔을 징그러운 뱀무더기를 그림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다.

수십 마리의 뱀을 그린 후 뱀머리에다 성냥개피를 놓아 세어보니 33마리 .

여기에 사랑하던 뱀띠남자의 나이에 맞추어 두 마리를 더그려 넣어 35마리로 완성하였다.


                                               < 황혼의 통곡 >  미완성


                                                  < 카바레 뉴욕 >


                                   < 환상 여행 >  미완성



                            

                                          < 초혼 >  천경자의 고향인 고흥의 바다 풍경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 백야 >

   


                                             드로잉







바람이 불어도 좋다. 어자피 부는 바람이다. 어디서 일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들. 그 위에 인생이 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믿는 신은

한 인간이 어느만큼이나 열렬하게

자기 삶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존재하기도 하고 ,

그 운명의 문은 열리리라고 믿는다.

담배를 피워 물고 긴 한 숨을 내려 쉬며 거울에다 연기로 자유라고 쓴다.

내 슬픈 전설이라는 말이 웬지 좋았고

나의 나이 만49세 때

아마튜어가 아코디언을 켜듯 쓰기 시작한 글이어서 49페이지라 덧붙여 책이름을 지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 내 생애는 몇 페이지의 여백이 남아 있는 것일까?


자유로운 여자 < 집현전 19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