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묘 250621

2025. 6. 30. 13:48역사 탐방

 

1학기는 끝났지만 6월 시내 답사는 21일 사육신공원으로 가기로 했다.

오래전 다녀왔던 곳이지만 다시 방문하는 기회가 와서 노량진역

2번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노량진역에 걸린  조선시대 지도를 보며 옛날에 노량진이 중요한 역활을 하던

곳이었음을 선생님이 설명해 주셨다.

 

 

사육신묘는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원래는 박팽년(朴彭年) · 유응부(兪應孚) · 이개(李塏) ·

성삼문(成三問)의 묘만 있었고,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의 묘는 없었다.

그러다가 서울시에서 1977∼1978년까지 사육신 묘역의 정화 공사를 할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假墓)를 추봉(追封), 사육신의 묘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 묘가 있는 곳은 지난날 사형이 집행되던 곳이라는 말이 전하기는 하나,

사육신 중 박팽년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옥사했고, 유성원은 잡혀가기 전에 자기 집에서

자인(自刃 : 칼로 자결함)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거열(車裂)을

당했으므로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정중히 장사지내 줄만한 사람도 당시에는 없었다.

박팽년의 유복자만이 겨우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고 하는데, 나머지 사육신의 아들들은

모두 교형(絞刑)을 당했고, 남은 가족들도 노비가 되었다. 또, 먼 일가나 이웃들도

국가적인 기휘(忌諱)를 받은 이들을 장사 지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므로

이곳에 육신묘가 처음 마련된 과정은 알 수가 없다.

 

 

사육신 묘(死六臣墓)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동작구 노량진동.

이곳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

단종 3년 음력 윤 6월 (1455)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하매

이에 의분을 품은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탄로되어 참혹한 최후를 마치니 이들을훗날 사육신이라 부르고 있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 7년(1681)에 산기슭에 민절 사당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 의로운 충혼들을 위로하고 불굴의충의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의절사, 불이문, 홍살문, 비각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 도장으로 정화하였다.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 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 후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추봉하였다.

사육신 역사 공원에 묘가 7기인 까닭은
사육신의 충절과 그 의로움을 추모하여, 1691년(숙종 17) 이곳에 민절 서원을 세우고,

1782년(정조 6)에는 무덤 곁에 비석을 세웠다.
세조 당대는 물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사육신묘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러다 1614년에 나온 "지봉유설"에서 이수광은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빌려

노량진 육신묘를 언급하였다.
이수광은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3인의 묘가 있다고만 기록하였다.

이후 1650~1670년 사이에 박팽년의 후손 박숭고의 노력으로 노량진 육신묘가

재정비되고 국가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육신 가운데 유성원, 하위지의 묘는

이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서 재정비할 때 함께 정비하지는 못했다.
일제 강점기 이후 1950년대까지는 무덤과 비석 등이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다가
1972년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 개의 4기 묘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77~1978년에는 서울시의 사육신묘 정화사업 때 하위지와 유성원 그리고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 모의를 추진한 김문기의 가묘를 추가로 안치, 정비하여 지금에 이른다. -현지 안내문-

 

 

 

 

 

 

 

 

 

 

 

불이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사당인 의절사가 나온다.

불이문은 단종 외의 임금은 섬기지 않겠다는 불사이군의 뜻을 담고 있다 한다.

의절사

 

불이문을 지나니 사육신 사당 '의절사' 가 있고  왼쪽으로는 신도비각이 있고 ,

오른쪽으로는 높이 2m 쯤되는6각 기둥의 '사육신묘비' 가 있다.

 

 

일곱 분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의 내부. 매년 10월 9일 추모향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신도비각.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로 설치된 민절서원은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고,

지금 그 자리에는 1954년서울시가 세운 6각(角)의 사육신묘비가 있다.

 

의절사 옆문으로 나가면 무덤들이 있다.

 

 

1456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6명의 신하 즉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 이들은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이에 분개, 단종 복위를 꾀했다. 세조가 명나라 사신 환영회를 열기로 했는데,

그때 성승과 유응부가 칼을 차고 왕 옆에 시립하는 별운감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연회장이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세우지 않기로 해 거사가 보류되었다.

그때 동참했던 김질이 겁을 먹고 세조에게 밀고했다. 이에 거사에 가담한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는데

희생자는 70여 명에 이르렀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까지도 연좌 처벌을 받아 멸문지화를 당했다.

남효온은 문집 『추강집』에 ‘육신전’을 싣고,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신하를 기록했다.

 

 

지금 육신묘가 있는 곳에는 일찍부터 박씨지묘 · 유씨지묘 · 이씨지묘 · 성씨지묘라

새겨진 표석이 서 있는 4개의 묘가 있었고,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었는데,

일찍이 민간에서 이 묘소를 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에 있는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고 전해왔다. 애당초 하위지, 유성원의 무덤은 없었는데 

그 후 들어셨으며 , 김문기의 허묘도 새로 마련했고 , 당시 새남터 형장에 처참하게

버려져 있는 시신을 김시습이 한밤중 몰래 수습하여 이곳에 안장했으며 , 유성원은 자살을

하였는데도 이 곳에 묻힌걸 보면 이 노량진이 처형장은 아니었다고.

 

 

 

 

 

 

 

 

 

 

 

영상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1학기 수업은 이것으로 끝이고 2학기는 추첨 결과에 따라 수업에 참석 여부를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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