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2015. 7. 7. 20:02기억하고 싶은 시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 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 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이 적 서툰 노래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원추리는 그 주홍빛 꽃을 터트릴 것이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 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 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 그렇게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별일도 다 있지, 그는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내뱉고 부르면서

강물은 숨쉬는가

 

2.

그 낡은 집을 나와 나는 밤거리를 걷는다

저기 봐라, 흘러 넘치는 광고불빛과

여자들과

경쾌한 노래

옷을 갈아입은 성장(盛裝)한 마네킹들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다

생()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도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트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줏잔을 흔들면서 몇 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박영근 시인

1981년 ‘반시(反詩)’ 제6집에 ‘수유리에서’ 등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 ‘대열’, ‘김미순傳’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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