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170219

2017. 2. 24. 23:02서울





법정(1932∼2010) 스님의 입적 7주기(음력 1월 26일)를 맞아 22일 오전 11시 서울 성북구 길상사 설법전에서 추모 법회를 봉행한다



길상사는

본래는 '대원각' 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 ~ 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김영한은 일제 시대의 시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로 알려져 있으며,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처음 1985년에 김영한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절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법정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했고 이에 법정 또한 이를 받아들여,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며 처음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 등록되었고 같은해 2월 14일에 초대 주지로 청학이 취임하였다.

김영한은 평생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된 김영한의 대원각 재산은

시가 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영한은 "천 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했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1999년 11월 14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영한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사찰의 창건주였던 법정은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었고,

김영한 사후에도 길상사에서 정기법회를 열었으며,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 로 입적하였다.

또한 길상사의 개원법회가 열리던 1997년 12월 14일에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법회에 참석해 법정과 함께

나란히 축사를 했고 법정 또한 이에 답하여 1998년 2월 24일에 명동성당을 찾아 법문을 설법하였다.

길상사 경내에는 공덕주 김영한의 공덕비와 함께, 법정의 영정과 그 생전 유품들을 전시한 기념관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대원각의 주인었던 김영환.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실천한 .


                  








                      


스님이 서울로 올라 오시면 묶으셨던 진영각



손수 만들어 앉으셨던 의자.


안에는 법정스님이 쓰시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법정스님이 쓰시던 염주.


                       

                                                            법정스님의 유골을 모신 곳















법정 法頂


(본명 박재철 朴在喆 / 1932 ~ 2010)


1932년 전라남도 해남 우수영에서 태어났다.

한국 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인간의 선의지(善意志)와 삶과 죽음에 고뇌하며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56년 효봉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후 통영 미래사,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스승을 모시고 정진했다.

 이 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기초를 다지고 1959년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1960년 통도사에서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하였고, 1967년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스님과 더불어 불교 경전 번역을 하며,

불교계 언론과 유력한 신문에서 죽비 같은 글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73년 함 석헌, 장준하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75년 젊은 목숨을 앗아간 제2인혁당 사건을 목격한 스님은 큰 충격을 받아

그 해 10월 본래 수행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무소유 사상을 설파하며

자기다운 질서 속에 텅 빈 충만의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고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을 피해,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생명 중심의 세상을 명상하며 홀로 수행 정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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