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n of Poros (Le soleil de Poros). 1968.
Oil on canvas.
160 x 160 cm.
Private collection.
The Cattle Dealer. 1912.
Oil on canvas.
97 x 200.5 cm.
강렬한 황색 수레바퀴와 암말의 태내에서 투시되는 망아지는 윤회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조형을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려고 한것은 고향에대한
향수인것 같다. 이 그림은 항상 어린 마르크 샤갈을 데리고 도살업자에게 가축을 팔러가던 숙부 내외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도살의 광경이 그를 항상
전율케 했으나,그의 그림에서 짐승은 언제나 축성되어 있다. 여기서도 부부의 얼굴은 앞을 보지않고 여자가 지고 있는 가련한 작은 동물을 되돌아 보고있다.
The Blue Face (Le visage bleu). 1967.
Oil on canvas.
129.7 x 96.6 cm.
Private collection.
The Wedding Candles. (Les lumi?res du mariage).
Private collection.
Scene design for the Finale of the Ballet "Aleko". 1942.
Gouache on paper.
38 x 57.1.
The Museum of Modern Arts, New York, NY, USA.
Equestrienne (L'?cuy?re). 1931.
Oil on canvas.
100 x 80.8.
Stedelijk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샤갈은 193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가선 서커스를 주제로한 연작을 그리게 되는데, 이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작품의 하나이다. 바이올린을 턱밑에 끼고
꽃다발을 입에 문 백마가 있고, 그위에 올라탄 빨간 부채를 든 빨간 옷의 여인과 초록색 상의의 연인이 있다. 오른쪽 밑의 멀리로는 러시아의 마을과 곡마단이 있고, 그와 대각선을 이루는 화면 왼쪽 위에도 바이올린을 켜는 사나이가 보인다. 한마디로 자유로운 사랑의 찬가인데, 샤갈의 독특한 환상인 이 찬가는 주제 요소의 매혹적인 중첩과 꿈속 같은 색조 분위기로 인해 무한한 변주를 보인다. 샤갈은 만년의 많은 작품에서처럼 유년 시절의 경험을 되살리고 있다. 그에게 있어 그러한 유년 시절의 경험은 상상력에 의해 여러번 되풀이되고 그모습도 달리하고 있으나 긴 생애 동안 그의 마음에서 결코 사라진 적이 없었다.
Peasant Life. (La vie paysanne). 1925.
Oil on canvas.
101 x 80 cm.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Y, USA.
The Promenade (La promenade). 1917-18.
Oil on canvas.
169.6 x 163.4 cm.
State Russian Museum, St.Petersburg, Russia.
Burning House (La maison br?le). 1913.
Oil on canvas.
107 x 120.6 cm.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NY, USA.
Still Life with Vase of Flowers.
Watercolor and Indian ink.
52 x 44 cm.
Private collection.
The Spoonful Of Milk, 1912
Maternity. (1912)
아이를 밴 여자
화면의 지평선을 아래로 내릴 수 있는 데까지 내리고, 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아기 예수를 속에 가진 성모가 우뚝 섰다. 18세기까지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이콘 (聖像)의 전통으로, 아기 예수를 원형이나 타원형의 테두리 속에 넣어 성모의 뱃속에 투시시켜 그리는 것은 넓게 알려진 일이지만, 샤갈은 이 작품 속에 그 전통을 현대적 성상으로 그렸다. 태아 주변에 그려진 타원 속의 소우주와 성모를 둘러싸고 있는 외계와의 교감이 샤갈의 분명하고 우아한 필법에 의하여 잘 표현 되어 있다. 입체파인 화면 분할법은 차츰 화면에서 오히려 내적으로 샤갈의 조형적 의도에 순화되어 공간을 더욱 깊게, 크게 설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성모의 표정이나, 스카프, 치마 등에서 보여지는 세속성은 오히려 속(俗)과 성(聖)의 접근을 느끼게 한다.
The Pinch Of Snuff, 1912
Jew At Prayer, 1912-13
토라의 푸른 두루마리를 등에 지고, 짙은 어둠 속에서 한 개의 기호처럼 몸을 구부린 노인의 그림이다. 같은 피의 운명에 놓인 스틴 등 자연의 사물을 자연의 사물을 전부 비틀어서 그린 스타일이 상기된다. 1912년에는 파리에 있으면서 신을 두려워하는 노인의 그림을 여러 점이나 계속 그렸다. <토라를 가진 사나이>는 상체를 직각으로 젖혀서 하늘을 처다보고, <성 보아튈리에>는 S자 형의 아크로바틱 포옴을 취하고 있다. 이 굴절하는 것에 대한 오브세셩(강박 관념)은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 아닐까?
The Fiddler, 1912-13
꽃다발과 소, 닭, 서커스와 더블어 샤갈의 주요한 조형기호(造型記號)가 된 바이올린은 여기서는 아직 충분히 그 자격을 얻지 못하고 있다
1909년의 <결혼>에서는 혼례 행렬의 선두역을 맡은 악사로, 또한 1911년의 <바이올린 주자>에서는 문전 걸식을 하는 노인의 장사 밑천으로, 이 그림에서는 주정꾼의 노리개에 불과하므로 어느것이나 사랑이 뿌려 주는 별들의 하나로 변모하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서 악기는 맑은 날에 지붕위에 올라가서 흥취있게 악기를 켜고있던 작가의 어린시절 숙부들의 추억과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인물은 초자연적인 색채와 크기로그려져 있으며, 지붕이라기 보다는 지구를 딛고 서있는 듯하며, 또한다채로운 발자취는 천상의 눈(雪)위에 남겨진것 같다.
1887. 7. 7 러시아 비테프스크~1985. 3. 28 프랑스 알프마리팀 생폴.
러시아 태생의 화가·판화제작자·디자이너.
회화 이론을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내면의 시적 호소력을 이용하여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형식 요소들과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나와 마을 I and the Village〉(1911)과 같이 초현실주의 이전에 나온 그의 초기 작품들은 현대 미술에서 처음으로 정신의 실체를 나타낸 것들이었다. 다양한 표현 수단을 사용한 그의 작품들 가운데는 연극과 발레 무대장치, 성서를 삽화로 그린 동판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예를 들면 〈미국의 창문들 The American Windows〉, 1977) 등이 있다.
샤갈은 폴란드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러시아 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형제가 8명이 있었으며 식구들은 모두 독실한 유대교도였다. 그의 가족은 비테프스크에 사는 2만여 명의 유대인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초라하게 살았으나 가난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청어 도매상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생선·밀가루·설탕·양념 등을 파는 가게를 경영했다. 어린 샤갈은 유대인의 초등학교에 다닌 뒤 러시아어로 가르치는 지방공립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유대 교회당에서 성서를 읽었고 노래를 불렀으며, 정통 합리주의를 반대하는 신비주의적 경향의 유대교파인 하시드파의 사상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학교에서 데생의 초보를 배운 뒤 그 지방 출신의 사실주의 화가인 제후다 펜의 작업실에 들어가 회화를 공부했으며,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 그곳에서 3년 동안 간헐적으로 공부하다 마침내 그무렵 무대장치가로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던 레온 바크스트 밑으로 들어갔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그림 속에 이미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이 나오는 악몽 같은 분위기의 〈죽은 남자 The Dead Man〉와, 검은색과 흰색의 배합을 실험한 초상화 〈검은 장갑을 낀 나의 약혼녀 My Fiancée with Black Gloves〉가 있다.
1910년 샤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후원자가 제공한 생활비를 가지고 파리로 갔다. 몽파르나스에서 하숙생활을 하며 1년 6개월을 보낸 뒤, 자유분방한 미술가들이 모여 사는 라뤼슈(벌집)라는 초라한 마을의 끝에 있는 작업실로 이사했다. 그는 그곳에서 표현주의 화가인 수틴과 색채추상화가인 로베르 들로네, 입체파 화가인 알베르 글레즈, 장 메칭저, 페르낭 레제, 앙드레 로트 등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 시인인 블레즈 상드라르, 막스 자코브, 기욤 아폴리네르 등을 만났다. 그 집단에서는 거의 모든 종류의 대담한 회화를 장려했으며, 샤갈은 그러한 자극에 영향을 받아 러시아에 있을 때 드러내기 시작한 시적이고, 겉보기에는 비합리적인 경향들을 빨리 발전시켜나갔다. 그와 동시에 파리의 미술관들과 화랑들에서 본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및 야수파 화가들의 그림들에 영향을 받아, 그가 고향에 있을 때 사용했던 대체로 칙칙한 색채는 더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파리에 머물렀던 이 4년의 기간은 때때로 그의 전성기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Self-Portrait with Seven Fingers〉·〈나와 마을〉·〈아폴리네르에게 바치는 경의 Hommage à Apollinaire〉·〈갈보리 언덕 Calvary〉·〈바이올린 연주자 The Fiddler〉·〈창문을 통해 본 파리 Paris Through the Window〉 등이 있다. 이 그림들에서 이미 샤갈은 본질적으로 그뒤 6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양식을 개발했다. 그의 색채는 때때로 엷은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복잡한 특성과 반향을 띠어갔다. 종종 거꾸로 된 묘한 형상들을 캔버스에 아무렇게나 배치했는데, 이것들은 때때로 필름 몽타주와 비슷하면서 명백히 의도한 것 같은 내면의 환상세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디시어(語)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농담이나 러시아의 전래설화, 또는 보드빌을 떠오르게 한다. 주로 등장하는 인물은 로맨틱하게 잘생기고 곱슬머리에 약간 동양적으로 보이는 젊은 시절의 화가 자신인 경우가 많다. 어린시절과 비테프스크에 대한 추억들이 이미 표현의 주요원천이 되고 있다.
샤갈은 파리에서 해마다 열리는 '독립미술가전람회'와 '가을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한 뒤, 1914년 현대 미술 잡지인 〈슈트름 Der Sturm〉을 발간한 베를린의 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져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 전시회에 들른 뒤 그는 비테프스크에 갔다가 그곳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맞이했다. 그는 그 시기에 비교적 사실주의적인 양식으로 그 지방의 풍경을 담은 유화와 노인들을 주제로 한 일련의 스케치를 그렸는데, 노인을 주제로 한 연작으로는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 The Praying Jew〉·〈풀밭의 유대인 Jew in Green〉 등이 있다. 1915년에 그는 비테프스크의 부유한 상인의 딸인 벨라 로젠펠트와 혼인하여 이때부터 그녀를 자신의 그림들에 많이 등장시켰는데, 그러한 것으로는 날아다니는 연인을 그린 〈생일 Birthday〉과 활기차고 곡예를 하는 듯한 〈술잔을 들고 있는 이중 초상 Double Portrait with a Glass of Wine〉 등이 있다.
1917년 10월혁명이 일어나자 샤갈은 처음에는 이것에 몰두했다. 그는 비테프스크 지역의 예술위원이 되어 지방 아카데미와 박물관을 위한 야심적인 사업들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2년 6개월 동안 열심히 활동했는데도 미학과 정치를 둘러싼 싸움들이 점점 심해지자 활동을 그만두고 모스크바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한동안 무대미술에 관심을 기울여 유대인 작가인 숄렘 알레이헴의 작품들을 위한 무대장치·의상이나 카메르니 극장을 위한 벽화들을 만들었다. 1922년 그는 영원히 러시아를 떠나 처음에 베를린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그가 1914년에 남겨놓았던 그림들의 상당수가 없어졌다는 것을 발견한 뒤 1923년 아내와 딸과 함께 다시 파리로 가서 정착했다.
샤갈은 베를린에 있는 동안 판화기법을 배웠다. 친구인 상드라르의 소개로 파리의 미술상인인 앙브루아즈 볼라르를 만난 뒤 곧 니콜라이 고골리의 소설인 〈죽은 영혼들 Dead Souls〉의 특별판에 삽화로 넣을 동판화 연작을 의뢰받았으며 그뒤 오랫동안 판화제작자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그뒤 3년 동안 그는 고골리의 책을 위하여 107점의 전면 판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무렵 볼라르는 이미 또다른 계획(라퐁텐의 〈우화집 Fables〉에 18세기의 판화들과 비슷한 채색 삽화들을 넣은 개정판을 제작하는 일)을 세워놓고 있었다. 샤갈은 복제용으로 100점의 구아슈 그림을 준비했지만, 그의 색들은 너무 복잡하여 계획된 인쇄 과정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곧 흑백 동판화로 바꿔 1931년 그 판화들을 완성했다. 이무렵 볼라르는 성서에 삽화로 넣을 동판화를 제작해 달라는 또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1939년까지 샤갈은 66점의 판화를 완성했지만, 그해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볼라르가 죽자 그 계획은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그 일을 시작하여 모두 105점을 완성했다. 파리의 출판업자인 E. 테리아드는 볼라르가 남기고 간 많은 사업들을 다시 시작하여 1948년에 〈죽은 영혼들〉(각 장의 표제용으로 11점의 동판화를 더 만들어 모두 118점으로 이루어짐)을, 1952년에 라퐁텐의 〈우화집〉(표지용으로 2점의 동판화를 더 만들어 모두 102점으로 이루어짐)을, 1956년에 성서를 발간했다. 샤갈은 이렇게 늦어진 대작업들뿐만 아니라 그보다 규모가 작은 판화집들과 낱장의 판화 작품 및 채색 석판화와 모노타이프를 많이 제작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초에 그의 그림은 대작이 줄어들었으며 많은 비평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질도 떨어졌지만, 어쨌든 더욱 뚜렷이 시적인 성향을 띠었으며 더욱 인기를 얻었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에펠탑 앞의 신랑과 신부 Bride and Groom with Eiffel Tower〉·〈서커스 The Circus〉가 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가 부상하면서 새로운 세계대전의 위험이 증대하자 샤갈은 인상적인 그림인 〈흰 십자가 White Crucifixion〉에 반영되어 있듯이 매우 다른 종류의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그는 널리 여행을 다녔는데 1924년에는 브르타뉴에서, 1926년에는 프랑스 남부에서, 1931년에는 성서의 동판화를 준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그리고 1932~37년에는 네덜란드·스페인·폴란드·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했다. 1931년 그는 자신이 예전에 러시아어로 썼던 〈나의 생애 My Life〉를 프랑스어로 번안하여 출판했다. 1933년 스위스의 바젤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1939년 카네기상을 타면서 누구나 인정하는 현대의 대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프랑스의 루아르 지방으로 이주했으며, 그뒤 유럽의 모든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위협이 차츰 심해지자 더 남쪽으로 피해갔고, 마침내 1941년 7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멕시코에서 여름을 보낸 것을 제외하고는 그뒤 몇 년 간 뉴욕 시나 그 근처에서 대부분을 보냈다. 1942년 뉴욕 시의 '발레 시어터'를 위해 발레 〈알레코 Aleko〉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만들었다. 샤갈을 비롯해 모두 러시아인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 창작물은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집시들 The Gypsies〉이라는 시에서 줄거리를 따왔고 음악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의 〈가단조 3중주 Trio in A Minor〉에 기초했으며 역시 러시아의 레오니드 마신이 안무를 맡았다. 샤갈은 한동안 예전에 프랑스에서 다루었던 주제들을 그림에서 계속 표현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노란 십자가 Yellow Crucifixion〉·〈깃털과 꽃들 The Feathers and the Flowers〉이 있다. 그러나 1944년 아내 벨라가 죽자 그녀에 대한 추억들을 종종 비테프스크를 배경으로 다루었다. 〈그녀 Around Her〉(1945,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그녀를 울고 있는 아내이자 유령의 신부로 그리고 있으며, 〈화촉 The Wedding Candles〉(1945, 프랑스 개인 소장)·〈야상곡 Nocturne〉(1947, 개인 소장)에서도 다시 그녀를 신부로 그리고 있다.
1945년 그는 뉴욕 시에서 상연된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The Firebird〉를 위하여 배경막과 발레 의상을 제작했다. 그의 작품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미국의 미술평론가들과 수집가들은 1946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과 그로부터 몇 달 뒤 시카고 미술연구소에서 열린 회고전을 보고 그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1947년 시카고대학교 출판부가 발행한 〈마음을 그린 작품 The Works of the Mind〉에 들어 있는 한 강연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입체파 화가들에게 그림은 어떤 질서를 갖춘 형태들로 뒤덮인 표면이었다. 나에게 그림은 논리와 설명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어떤 질서를 갖춘 것들(물체·동물·인간)의 묘사로 뒤덮인 표면이다. 구도의 시각적 효과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나는 '환상'과 '상징'이라는 말들을 싫어한다. 우리의 모든 정신세계는 곧 현실이다. 그것은 아마 겉으로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더 진실할 것이다."
1948년 그는 이미 프랑스를 2차례 방문한 데 이어 다시 프랑스로 이주했는데, 처음에는 파리 교외에서 살다가 결국은 코트다쥐르의 방스와 그 옆의 생폴에서 살았다. 1952년 바바 브로드스키와 재혼하고 65세의 나이에 친숙하고 시적이며 추억에서 따온 모티프들이 계속 작품에 나오긴 하지만, 거의 새롭다고 할 만한 활동을 재개했다. 고대 코트다쥐르의 도기 제조 중심지들에 가까이 살았던 것에 영향을 받아 그는 실험적으로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3차원적 형태에 대한 경험을 기초로 하여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1953~56년에는 고향인 비테프스크를 잊지 못하면서도 파리에 대한 애정으로 일련의 그림들을 그렸다. 1958년에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한 모리스 라벨의 발레인 〈다프니스와 클로에 Daphnis et Chloé〉의 연출을 위하여 무대장치와 의상을 제작했다. 1958년 이후에는 많은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들을 설계했는데, 첫 작품은 메스 성당과 예루살렘에 있는 '하다사헤브루대학 의료 센터'의 예배당을 위한 것이었다. 1964년에는 뉴욕 풀턴에 있는 교회의 창문을 완성했고 파리 오페라 극장의 새 천장을 완성했으며, 그로부터 2년 뒤 링컨 센터에 있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새 건물을 위하여 2점의 커다란 벽화인 〈음악의 샘 The Sources of Music〉·〈음악의 승리 The Triumph of Music〉를 완성했다. 1967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한 모차르트의 〈마적 Magic Flute〉을 위하여 무대장치와 의상을 제작했다. 1973년 프랑스 니스에 '마르크 샤갈 성서 메시지 미술관'이 문을 열었으며, 1977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그에게 레종도뇌르 최고훈장을 주고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회고전을 열어 그를 예우했다. 1977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제와 시카고의 전임 시장인 리처드 J. 데일리를 기념하여 만든 샤갈의 〈미국의 창문들〉이 '시카고 미술연구소'에서 공개되었다.
큰 꽃다발과 우울한 어릿광대, 날아다니는 연인들, 환상적인 동물들, 성서의 예언자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연주자 등의 이미지들을 묘사한 민속적인 작품들로 말미암아 샤갈은 20세기 파리파의 중요한 전위미술가들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이 환상적인 주제를 화려한 색과 특유의 능란한 붓질로 묘사했는데, 그의 양식은 표현주의나 입체파, 추상미술과 같은 1914년 이전의 운동들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개인적인 성향을 띠었다. 비평가들은 때때로 그의 작품 대부분에는 가벼운 감상이 깃들어 있고 작품의 질이 고르지 않으며 모티프가 지나치게 되풀이된다고 비판하지만, 특히 걸작들은 현대의 작품들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각적 은유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한다.
R. McMullen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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