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29. 23:27ㆍ그림
Jean Franois Millet, 1814 ~ 1875
쿠르베나 마네와 달리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사실주의 작가로 활동한 밀레는 다른 주제의식을 소유한 작가였다. 크락은(Clark) Absolute Bourgeois에서 밀레의 주제가 자신의 '노동'으로 주어진 형태에다 의식으로서의 무게가 매일의 일상을 보편적인 숭고함과 웅대함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해석했다. 밀레를 자신의 논의의 틀에 맞게 적용시킨 크락의 주장은 나름대로 그의 작품을 적절하게 이해했고 그의 주제와 당시 계층의 문제를 연결하려는 의도가 돋보인다. 밀레는 자신이 유행하는 양식을 따라 팔릴 그림을 제작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피하고 굳이 이러한 주제를 계속 추구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는 계몽주의적, 금욕주의적 작가이다. 밀레와 바르비종(Barbizon) 파는 사실주의 작가들이면서도 낭만주의적 경향이 강했기에, 농촌 생활의 구체적 노동과 환경을 다루지만, 날카로운 비판의식보다는 미화된 고요함이 있다.
밀레는 노르망디 작은 마을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미술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틈틈이 그림공부 하면서 화가의 꿈을 키워갔다.
1838년, 파리 국립 미술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교과과정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루브르박물관의 명화들을 모사하면서 홀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아는 사람들에게 초상화를 그려팔면서 어렵게 생계유지를 하던 그는 1848년 살롱전에 <키질하는 농부>를 출품, 이로 인해 국가의 공식적인 작품 주문까지 받게 되어 조금씩 생활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때 파리에 콜레라가 돌자 이를 피할겸 가족들과 함께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조용한 시골 마을인 바르비종으로 이주, 그곳에서 아름다운 농촌 풍경과 농민들의 성실하고 소박한 모습을 즐겨 그렸는데, 이런 모습을 화폭에 담는 것이 더욱 진실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다.
밀레가 그린 농민들은 바르비종에서 땅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작품 '만종'에 대해서 밀레 자신은 문학적인 감정보다는 음악적인 감정을 더 강조했다고 한다.
밀레의 정신은 훗날 쿠르베의 사실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밀레는 한 때의 도시생활을 제외하고는 농촌에 파묻혀 살았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농촌 풍경과 농민들의 생활을 즐겨 그렸으며 자연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들은 자연을 향한 깊은 철학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고일컬어 진다.
그때문에 종교화가로 불려지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한 시대의 풍속화이며 그런 이유로 그는 농민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밀레의 그림은 대부분 고요하고 경건하며 유화를 주로 많이 그렸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는 스케치와 파스텔화를 주로 그리게 된다.
밀레의 대표적인 작품은 '만종'과 '이삭줍기'이다.
밀레의 '만종'은 종교화의 새로운 양식이라고 칭송되며
'이삭줍기'는 매우 사실적이고 견고한 구성을 지녔다고 평가받고 있다.
밀레는 평생 가난과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농촌에서 목가적인 배경의 그림을 많이 그리고 자연을 그린 밀레의 작품엔 유독 가을과 관계된 그림들이 많다. 결실과 수확의 계절처럼 마음의 풍요를 지니고 싶었던 걸까.
밀레의 초상화
칠면조가 있는 가을풍경
가을바다의 어부들
가을 석양
가을이 익어가는 시골집
가을 폭풍
건초더미
건초를 묶는 사람들
그레빌 언덕의 집
나무 아래의 소녀
모이주는 아낙네
양치기소녀와 양떼
어린 양치기소녀
키질하는 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