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2011. 5. 31. 14:02좋은글

 

                                                                                         

 

 

등    대

 

 

 아버지가 병으로 누운 뒤로 수연이네 집은 언제나 우울했다.

몇 년 전, 수연이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

는 끝내 중풍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몸의 반쪽이 거의 마비된 아

버지는 거동이 불편했다. 그리고 중풍 후유증으로 언어장애까지

생겼다. 말수가 없던 아버지는 병으로 누운 뒤 더 말이 없어졌고,

깊게 그늘진 눈으로 온종일 방 안 천장만 바라보았다.

 

 어느 겨울날, 수연이 오빠인 성준은 대학 합격통지서를 받아

들고 집으로 왔다.

 "아주 잘했구나. 성준아, 고맙다."

 

 엄마는 오빠의 합격을 기뻐했다. 하지만 엄마는 이내 쓸쓸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 병원비도 빚을 지고 있는 형편에

대학 등록금까지 마련한다는 것은 엄마에게 너무도 힘겨운 일이

었다. 게다가 서울에 있는 대학이라 자취나 하숙까지 해야 했다.

 

 "성준아, 에미로서 자식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만약에, 만약에

말야, 등록금이 마련되지 않으면 어쩌지? 너도 알다시피 엄마가

봉제 공장에서 버는 돈만으로는 우리 식구 밥 먹고 사는 것도 빠

듯하잖니. 아버지 병원비도 그렇고 말야."

 핼쓱해진 엄마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엄마는 허망한

얼굴로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누운 아버지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남들은 대학에 못 들어가서 난린데 우리 집은 왜 이래. 말도

안 돼. 이번에 등록금 못 내면 나는 집을 나가서 혼자 살 거야. 그

런 줄 알라고."

 공부는 잘하지만 독선적인 성준은 목청을 있는 대로 돋우며

꼿꼿하게 말했다. 성준은 돌아누운 아버지를 흘깃 째려보고는 쌀

쌀맞게 낮을 찡그리며 방을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지

켜보던 엄마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맥빠진 얼굴로

훌쩍이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어서 정신 차리고 일어나야지요. 아이들에게 해줄 일은 산더

미 같은데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어떡해요. 나 혼자 동동거려 봐

야 밥 먹고 살기도 힘들잖아요."

 

 설움에 북받친 엄마의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엄마는 깡마

른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꺽꺽 흐느겼다. 그런 엄마가 가엾어

서 수연이도 옆에 앉아 훌쩍였다.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힌 엄마

는 머쓱해진 얼굴로 아버지를 위로했다.

 

 "여보, 내가 괜한 억지를 부려서 미안해요. 당신이 왜 이렇게

됐는 줄 전들 모르겠어요. 아까는 하도 속이 상해서 그랬어요.

마음 푸세요, 여보. 제가 잘못했어요."

 엄마의 말에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 집을 나간 성준은 며칠이 지나도록 소식이 감감했다. 들

어오지 않는 성준 때문에 수연이네 집은 더 무거운 슬픔 속으로

빠져들었다. 성준이 집을 나간 지 5일째 되던 날, 오후부터 질금

질금 가랑비가 뿌렸다. 성준이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우산도 없이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안방 문 틈 사이로 아버지의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어장애가 있는 아버지는 힘겨

운 목소리로 말을 더듬더듬거리며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여··· 여··· 여보세요. 제··· 제가요. 신장을 팔 수 없나 해서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아버지의 힘에 겨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제··· 제 아늘놈, 대··· 대학 등록금 때문에 그··· 그··· 그러는

거니까 꼭··· 꼭 좀 부··· 부탁드립니다. 꼭··· 꼭··· 이요."

 마루에 걸터앉은 성준이는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문득, 오래전 학교 선생님이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아버지의 사랑은 등대 같은 거야. 밝은 낮에는 태

연한 척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가, 어두운 밤만 되면 깜

박깜박 제 몸을 밝히는 등대와도 같은 게 우리들의 아

버지거든. 아버지들의 침묵 속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담겨 있는 거야."

 

 

 치자꽃처럼 하얀 성준이의 얼굴 위로 눈물 한 줄기가 가만가

만 흘러내렸다. 아린 가슴속에 꼭꼭 감춰두었던 울음이 꽉 다문

입술을 비집고 자구만 자꾸만 터져 나왔다.

 

 

출처 : 연탄길3(이철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