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묘

2011. 8. 24. 17:36서울

 

날씨가 오랫만에 화창하여 우리 남편과 함께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를 찾아보기로했다.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 "공주의 남자"의 시대적 배경으로 수양대군이 계유반정으로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세조가되가는 과정을 그린드라마.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충신들이 묻힌곳.

늘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한번 들어가봐야지 하기를 ..

사육신묘역 공원안으로 들어가니 세상과는 단절된 그 곳만의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옛날의 사건들이 한낮의 꿈처럼 몽롱하니 다가온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들어서니 홍살문이 그들의 충절을 말해주듯 말없이 서있다.

 

 

 

 

 

                     

 

분향을 하고 뒤로 돌아가니 사육신의 묘가 있었다.

 

 

 

 

 

                           안내사항을 읽어보고 들어가기가 조심스러워 살짝 앞에서 찍은  묘

 

 

 

 

 

 

 

 

 역사관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유물 정리를 위해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쉬웠지만 발길을 돌릴수 밖에.

 

 

                   올라가니 멀리 한강과 철길이 보이고 바로 앞에는 63빌딩이 보였다..

                 처음 63빌딩이  생길 때 만해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라고 시골에서 올라오면 

                                             그 곳을 많이 찾곤 했었는데.

 

 

 

 

 

 

 

                 곳곳에 맥문동 꽃이 제철을 만나 보라색의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고 있었다.

                              슬프고 가슴 아픈 역사는 먼~ 전설인양.

 

 

 

사육신묘는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세조 2년(1456) 목숨을 바친 6명의 신하 즉 사육신의 무덤을 말하며, 현재 이곳은 사육신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들은 단종 3년(1455)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이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노리던 중,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가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이들의 계획이 좌절되자 거사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礩) 등이 세조에게 단종복위 계획을 밀고하여 연루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받았다. 성삼문․박팽년(朴彭年)․유응부․이개(李塏)는 단근질로 죽음을 당하였고, 하위지(河緯地)는 참살 당하였다. 유성원(柳誠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고, 김문기(金文起)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사망하였다. 이밖에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가는 등 70여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그후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 7년(1681) 이 산기슭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으며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死六臣碑)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 불이문(不二門), 홍살문, 비각(碑閣)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량으로 정화하였다.
그런데 현재 이곳에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세조 2년 단종복위사건 가담자들의 참혹한 죽음 이후, 어느 스님이 성승ㆍ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 2년 6월 병오(丙午)조에는 성삼문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김문기ㆍ박팽년을 비롯한 성승ㆍ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이고,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유성원ㆍ하위지ㆍ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려졌다.
이리하여 서울특별시가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육신에 대한 논란을 조정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본래 이곳에 있던 박팽년ㆍ성삼문ㆍ유응부ㆍ이개의 묘에, 하위지ㆍ유성원ㆍ김문기의 가묘(假墓)도 함께 만들었다. 의절사 내의 위패와 마찬가지로 그 뒷편의 묘소는 동쪽으로부터 김문기ㆍ박팽년ㆍ유응부ㆍ이개ㆍ유성원ㆍ성삼문ㆍ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 퍼온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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