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긴전화

2012. 11. 18. 21:50기억하고 싶은 시




끊긴전화

-도종환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말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
전화가 끊어졌다.
누구였을까 깊은밤 어둠속에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두근거리는 집게손가락으로
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달려와
여보세요 여보세요 두드리다 한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그냥 돌아선 그는 누구였을까
나도 그러했었다. 나도 이 세상 그 어떤 곳을 향해

 

가까이 가려다 그만 돌아선 날이 있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항아리 깊은 곳에
비린 것을 눌러담듯 가슴 캄캄한 곳에
저 혼자 삭아가도록 담아둔 수 많은 밤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나 혼자만 서성거리다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을 허공에 던지다
단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날들이 많았다.
이 세상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평생 저 혼자 기억의 수첩에 썼다 지운
저리디저린 것들이 있을 것이다.
두 눈을 감듯 떠오르는 얼굴을 내리닫고
침을 삼키듯 목끝까지 올라온 그리움을 삼키고
입술 밖으로 몇번인가 서성이다 차마 하지 못하고
되가져간 깨알같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한반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기억하고 싶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0) 2012.11.29
밤 눈 / 기형도  (0) 2012.11.22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0) 2012.11.13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날은  (0) 2012.10.22
목마와숙녀  (0) 2012.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