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숙녀

2012. 10. 14. 00:33기억하고 싶은 시

 

 

박인환 "목마와 숙녀"에 대하여 
모든 떠나간 것들에 대한 애상과 그리움
박인환(1926-1956)은 김수영(1921-1968), 김경린(1918- ), 조향(1917- ) 등과 더불어 1950년대 모더니즘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시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들 시의 특징은 6.25 전쟁 이후에 널리 퍼진 허무주의와 상실감을 도시적 감수성과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렸다는 데 있다.
그 가운데 박인환은 가장 감성적인 기질을 가진 시인으로, 비애와 절망의 감정을 노래하는 데 치중하여, 자기 체념적 감상주의에 빠져 드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 시를 발표하고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목마와 숙녀

                          -  박인환  -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 할 그 무엇이 서러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0 :

영국의 여류소설가이며 비평가로 2차 세계대전 시기에

허무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강박관

념에 시달리다 1941년 3월 우즈강에서 투신 자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