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 주상절리 ,산방사 , 이중섭거리 ) 140928

2014. 10. 8. 23:46우리나라 이곳저곳

 

 

 

주상절리

제주도의 남쪽 해안에는 거대한 육각형 결정 형태로 바다에서 솟아오른 수직 돌기둥들이 독특한 해안 풍경을 이루는 곳이 있다.

주상절리는 짙은 재색의 육각형 돌기둥이다. 그런데 그 형태가 너무 일정해서 도저히 석공이 아닌 자연의 솜씨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 기둥들은 한라산에서 분출된 현무암  용암이 굳은 것이다.

오랜 세월 몰아치는 파도에 깎여 천연 계단이 된 곳도 있고 밀물이 들이치면 파도가 공중으로 10미터나 치솟는 곳도 있다.

행정구역상 이곳의 지명은 '지삿개 바위'이지만 원래 '신들의 제단'이라는 뜻으로 지삿개 해안이라고 부른다.

주상절리 해안은 2킬로미터로 서귀포시의 중문과 대포동을 잇는다.

대포동의 남서쪽에서 출발해 소나무 숲을 지나면 화산 암맥이나 용암, 용결 응회암 등에서 생긴 주상절리가 나온다.

 이 지역은 문화재로 지정된 곳으로,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가운데 하나이며 최근에는

여러 차례의 정상회담 장소로 활용되는 등 국제적인 관광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너무 아름다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 제주도를 여러번 왔어도 왜 이곳엔 오지 않았을까?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중국인 관관객들이 많이 와 있었다. 친절과 신용으로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해야 한다.

 

 

 

 

 

                        

 

 

   

                                       


중문단지 안에 있는  커피집 건물 ,

 

산방산

산방산은 안덕면 해안에 있는 절경이 빼어난 곳이다.
한라산에서 사냥하던 한 사냥꾼이 사슴을 쫓아 다니다 보니 한라산 정상까지 가게 되었다.
정상에서 한 무리의 사슴을 발견한 사냥꾼은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흰 사슴을 향해 활을 쏘았다. 급히 쏘는 바람에 활끝을 치켜들게 되었고 그 끝이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건들이고 말았다. 설문대 할망 때문에 화가 나 있던 옥황상제는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내던져 버렸다.
이봉우리가 떨어져 생긴 것이 산방산이다. 봉우리를 뽑아버린 자국은 움푹 패여 백록담이 되었다.
신기하게도..산방산 둘레와 백록담 둘레가 비슷하답니다

 

                                                                      오른쪽 밑에서 조금 올라가 보이는 굴이 산방굴사이다.

 

                                                    

 

 

 

 

 

 

 

                                                                  

산방사를 보고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산 중턱 쯤 굴에 부처님은 모신 곳이 있었다. 

                               

                                 

 

산방사와 주상절리를 들러 서귀포로 오니 날이 어두웠다.

이중섭미술관은 늦게오는 바람에 이중섭거리만 둘러보고 ( 먼저 왔을때 미술관은 보았으니 ) 올레시장을 구경하고 저녁으로 회를 먹었다.

 

이중섭

호는 대향(大鄕).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이희주(李熙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五山高等普通學校)에 들어가 당시 미술 교사였던 임용련(任用璉)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이중섭은 자유로운 기질의 소유자로 예민한 감수성과 순진무구함, 외곬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일본 유학시 보수적인 관학풍의 경향보다는 오히려 서구 아방가르드 회화에 깊이 빠지게 했다.

감정이 실린 격렬한 필치와 강렬한 색감, 날카로운 선묘로 이루어진 독특한 조형세계는 그가 야수파 화풍에 얼마나 심취했는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과 재능은 단순히 서양어법을 모방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그를 키워준 향토의 숨결과 희망을 담게 했다.

초기 작품에서는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향토적인 주제의 그림을 주로 그렸으나 그뒤로는 피난시절 가족과의 생활,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 등 생활일기와 같은 그림을 주로 그렸다.

그의 예술세계는 철저하게 자신이 처한 삶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어려운 시대에 개인적 삶의 고뇌를 지극히 진솔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냄으로써 한 시대의 아픔을 극명하게 나타냈다.

동시에 서양미술의 어법을 완벽하게 소화·흡수하여 개성적인 조형을 성취함으로써 한국미술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특히 원산에서 그린 현존하는 소묘를 비롯하여 가족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을 표현한 후기의 은지화는 자유자재한 선묘와 심도있는 정서적 표현력을 보인 탁월한 작품이다. 작품으로는 〈흰 소〉·〈투계〉·〈닭과 가족〉·〈아이들과 물고기와 게〉 등이 있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쇠소깍으로 갔다. 서울에서 팬션 예약을 하지 않고 왔다.

 비수기고,  예약을 하고 가면 다니다가 숙소로

찾아가는 번거로움을 줄이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