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25. 17:21ㆍ우리나라 이곳저곳
부산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자갈치시장역에서 내리면 국제시장, 부평 깡통시장을 갈 수 있다.
그 일대가 광복동 , 복수동 등 서울의 명동과 같은 곳이다.
부평 깡통시장은 군용 물자와 함께 온갖 상품들이 밀수입되면서 형성된 시장.
한국전쟁 직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 등 깡통제품을 많이 판매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
부평동시장의 죽집골목은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명소라고
잣죽, 깨죽, 호박죽, 팥죽, 녹두죽, 콩죽, 수수죽, 흰죽 등 뭍에서 나는 것이라면 무엇으로라도 죽을 쑤어 파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시장 상인들 한테 물으니 거의 없어지고
죽을 쑤어 파는 집이 한군데 있어 팥죽을 좋아 하는 나는 한 그릇 뚝딱.
유명하다는 비빔당면은 정말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깡통시장 상인들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던 비빔당면이
계속 내려오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는데 정말 배고플때 허기를 달래려고 먹으면 맛있다고 느낄까? 실망..
시장은 어느곳에 가 봐도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 비빔당면 -
저녁 나절이되니 야시장을 서려고 나오는 포장마차가 장사진을 이룬다.
이 포장마차는 24시간 영업하는 포장마차라고 한다.
깡통시장 야시장안에는 외국인들이 먹거리와 공산품들도 팔고 있다.
광복과 더불어 귀환동포들이 생활근거지로 모여들어 터를 잡고 노점을 차림으로써 시장으로 형성되었다.
본래 ‘도떼기시장’에서 출발하여 1948년에는 공식명칭을 ‘자유시장’으로 정하고 단층목조건물 12동을 건립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로 그야말로 성시를 이루었다.
그때부터 이 시장은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채 인근 광복동·남포동의 도심상가와 더불어 유통기능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귀환재일동포와 이북피난민들이 연고가 없는 부산에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시장상인으로 등장하였고,
끝내 상권을 장악할 만큼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 동란의 혼란 속에서도 이 시장은 활황을 누렸다.
원조물자·구호품·군용품이 절대부족상태의 민간소비용품과 함께 유통되었고 속칭 ‘양키시장’ 같은 곳에서는 외제품이 판을 쳤다.
서울에서 피난살이로 부산에 내려간 문인·식자들 중에서도 이 시장의 어느 구석에서 호구지책을 마련한 이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당시의 이 시장은 상거래장소에 그치지 않고 사회와 문화의 용광로이며 정보와 변화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12월과 1953년 1월의 연이은 두 차례의 대화재는 그것이 가져온 물질적 손실도 컸지만
전시의 엄동설한에 영세상인과 주민에게 준 충격 또한 매우 컸었다.
화재가 난 뒤 2층 건물 12개 동이 재건되고 상가의 면모가 일신되었으나, 이 시장은 이미 이전의 활기가 가라앉은 상태였다.
종전과 더불어 피난민들이 돌아가고 새로운 경제질서가 자리잡히기 시작하자,
이 시장은 그 동안의 갖가지 애환을 간직한 채 부산권의 일반 도·소매시장으로 탈바꿈하였다.
1966년 5월 정부가 시장대지를 상인들에게 불하하기로 약속하였고, 매매계약이 체결되었다.
이어 1968년 1월에는 목조건물 3동을 제외한 9개 동이 철근콘크리트로 개조되었고, 상가대지 2,177평이 불하되어 1,489칸의 점포가 개인별로 등기되었다.
1969년 1월 사단법인 국제시장번영회가 설립되어 상공부장관의 인가를 받았고, 1977년에 정식으로 시장개설허가를 받았다.
지금은 주로 양주, 의류, 장식품, 액세서리, 잡화, 전자제품을 취급한다
늦게 용두동 공원에서 야경을 보고 오는 중에 찍은 "국제시장 " 을 촬영한 가게 꽃분이네다.
가게가 문을 닫아서 겉모습만 보고 왔다.
부산에서 유명한 "씨앗호떡" 호떡을 구어서 반을 갈라 그곳에 씨앗을 넣어준다.
호떡을 좋아하는 난, 보이면 사먹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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