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때는 외로워하자.

2019. 5. 4. 14:52기억하고 싶은 시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 안도현

 

 

 

 

버스를 기다려 본 사람은 주변의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기억한다.

그런 사람들은 시골 차부의 유리창에 붙어 있는

세월의 빗물에 젖어 누렇게 빛이 바랜 버스 운행 시간표를 안다.

때가 꼬질꼬질한 버스좌석 덮개에다 자기의 호출번호를 적어놓고

애인을 구하고 싶어하는 소년들의 풋내나는 마음도 안다.

그런 사람은 저물 무렵 주변의 나무들이 밤을 맞기 위해 어떤 빛깔의 옷으로 갈아입는지도,

낮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밥짓는 저녁연기가 어떻게 마을을 감싸는지도 안다.

그리고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버스는 천천히 오거나 늦는다는 것도 안다.

작고 하찮은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가슴이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모퉁이 ... 안도현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겠지
하교 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거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 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 볼 꿈을 꾸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니야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든거야
남자가 아니야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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