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계태평

2025. 2. 28. 15:26역사 탐방

 

 

 

 

 

 

서울역사박물관은 13일부터 2024년 서울역사문화특별전 '태평계태평(太平繼太平):

태평성대로 기억된 18세기 서울'을 개최한다고 11일 밝혔다. 전시 기간은 25년 3월 9일까지다.

역사적 중흥기로 평가되는 18세기 서울의 도시 풍경에 주목하는 전시다.
선조 시기 시작된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의 대립은 점차 사색당파(노론, 소론, 남인, 북인)

체제로 분화되며 격화되었습니다.
붕당 간의 갈등이 민생과 무관한 문제(복상 문제, 세자 책봉 등)에 집중되면서

국정 운영이 마비되고 국력이 약화되었습니다.
 蕩蕩平平 탕탕평평
영조(1724-1776) 와 손자 정조 (1776-1800) 는 '탕평(蕩平)’을 이념으로 삼아 붕당간의 대립을

억제하고 민생 파탄을 해결하여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 했다.  이로서  태평성대로 기억되는

18세기 영조 와 정조 두 군주의 시대, 서울의 도시풍경을 볼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정조(1776∼1800)가 태평성대를 꿈꾸며, 한양의 도시 풍경을 글과 그림으로

담아낸 '성시전도'(城市全圖) 관련 유물 등 18세기 서울의 도시 풍경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 200건 310점을 선보인다.

정조는 1792년 한양 전체를 담은 성시전도를 그리게 하고, 이를 주제로 초계문신과

신하 33명에게 시를 짓는 시험을 치르게 했다.

성시전도는 18세기 서울의 도시 풍경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글이 아닌 그림 성시전도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18세기 조선을 탕평의 시대이자 태평의 시대로 기억합니다.

'탕평과 태평이라는 단어는 마치 짝을 이룬 듯한 운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두 단어는 그 뜻이 맞닿아 있습니다. 탕평은 유교 경전 < 서경 >에서 비롯된 말로 ,

임금이 그 어느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할 때 임금의 도가 넓고 평탄해져 백성과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영조가 즉위한 18세기초반의 현실은 탕평과 태평

그 모두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편을 나눠 옳고 그름을 다투던 붕당간의 갈등이 격화되어,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영조는 이를 타개하고자 '

탐평을 내세워 당파 간의 싸움을 멈추고 ,

지혜로운 인재를 등용해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쳐나갔습니다.

영조 뒤를 이은 정조 또한 탕평책을 계승하여 태평성대를 꿈꾸었습니다.

 

탕평의 시대를 맞이하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통해 지혜로운 인재를 등용하고 , 그들과 함께 새로운 정책을 추구했습니다.

정조는 선대왕의 업적 가운데 균역. 준천 , 탕평을 특히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는 영조가 가장 자랑스러워 했던 업적이기도 했습니다.

균녁법은 세금을 절반으로 줄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위한  조세 제도이며 .

준천은 도시의 물길을 정비하여 홍수를 방지하기 위한 토목 공사입니다.

이러한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하들의

다툼을 멈추고 지지세력을 모아야 했습니다.탕평은 백성을 위한 정책을 구상하고

실행하기 위한 정치적 방법론이었습니다.

 

 

 

성균관에 세워진 탕평비. 태학계첩, 이정보(1693~1766) 등 편찬, 1747년, 종이에 색,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담장 밖 오른쪽 아래로 건물한 개가 보입니다. 성균관에 들어가기위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반수교 옆에 세워진 탕렬비각입니다. 영조는 성급한 유생들에게 

편 가르지 않는 ' 탕평 ' 이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 직접 글을 짓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 집은 성균관 대사성 이정보와 유생들의 제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글과 그림으로

성균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도봉산을 그린 도봉도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원 가문의 도화서 화원 김석신이 그린 도봉산 풍경.

정선과 김홍도의 화풍의 영향을 받아 서울의 풍경을 진경산수화로 담아냈다.



노년의 영조가 백성을 생각하며 그린 바위.

영묘어필첩, 영조(재위 1724~1776), 1764년,

 

 

개천(開川, 청계천) 바닥에서 흙을 걷어내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돌 거북이가 장식된 오간수문 위, 중앙에 그려진 붉은 양산(紅傘)과 의자(交椅)는 작업 과정을 지켜보는

영조를 나타냅니다.

청계천은 도성 안의 여러 물길이 모여 한양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하천으로,

매년 물이 넘쳐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에 영조는 대규모 공사를 벌여 물길을 다스렸고, 준천 사업을 큰 자랑으로

여겨 이를 기념하는 화첩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준천이 이루어졌으니 신민이 힘을 다한 덕분이네.

이 성의를 가지고 한결같이 군사와 치국에 베풀어야 하리

- 준천을 기념하여 영조가 지은 시.

 



 

붕당의 역사와 황극탕평을 말하다 / 황극편, 1790년, 종이에 먹, 국립중앙도서관​

정조의 명으로 조선 후기 당쟁의 역사를 정리한 책입니다.

이 책은 조선의 14대 왕 선조에서 21대 왕 영조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 이어진 분열과 대립을 담고 있습니다.

제목의 '황극(皇極)'은 편을 가르지 않는 중도의 길을 뜻하며, 오직 황극만이 붕당간의

싸움을 멈출 수 있다는 정조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당쟁이 격화되자 각 당파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당론서를 편찬했는데,

이 책은 국왕 정조의 시각에서 당쟁의 역사를 기록한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큽니다.

아. 이 책은 바로 붕당(朋黨)의 분쟁 내용인데, 왜 황극(皇極)으로 명을 했는가?

그것은 황극이라야만이 붕당설을 깨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리 명명한 것이다.

- 정조가 지은 <황극편, 1790> 서문 중에서.

 

 

겸재가 그린 인왕산과 한양도성의 북소문 / 창의문도, 정선(1676~1759), 1740년대, 

겸재 정선은 서울의 풍경을 진경산수로 담아낸 화가입니다.

그는 장맛비가 갠 뒤 물기를 머금은 인왕산을 그려낸 <인왕제색도>로

한국 회화사를 대표하는 명작을 남겼습니다.

<창의문도>는 <인왕제색도>만큼 극적이진 않지만,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 한양도성을

지키는 창의문을 담아낸 수작입니다.

창의문 뒤로 보이는 인왕산의 기차바위와 그 위에 올라선 주먹바위에 대한 묘사는

겸재의 남다른 시선을 보여줍니다.

 

 

18세기 조선사람들의 세계관 변화를 보여주는 지도 , 천하도

 

천하도.  상상속의 나라와 지명.

 

서울의 다양한 이름을 보여주는 지도.

 

< 신광하 성시전도시 시권 >  정조의 채점지.

도1 <신광하 성시전도시 시권>
신광하(1729-1796), 조선 1792년(정조 16), 개인 소장(고령신씨 종친회)
 

정조시대에 ' 성시전도 '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신광하의 답안지다

정조가 시를 읽고 직접 평가한 점수  <  二 下 一  > 이하일  과 소리가 있는

그림 <  有聲畵 >이라는 어평이 붉은 글씨로 남아 있다.

그림 < 성시전도> 는 현재 전해지지 않았다.

 

1792년 어느 날, 정조는 규장각 차비대령화원들에게 한양의 도시 풍경을 담은 

< 성시전도 >를  그리게 하고, 이를 주제로 하여초계문신과 신하33명에게 시를 짓는 시험을 쳤다.

이렇게 완성된 글과 그림은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담아냈을 뿐 아니라 , '어진 임금이 다스려 

평화로운세상' 을 꿈꾸는 이상과 바람이 담겨 있다. ' 성시전도'는 18세기 도시풍경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록이다.  / 출처 서울 시티.

 

정조의 필체 붉은 글씨로 ' 소리가 있는 그림  < 有聲畵 > ' 이라 남김.

 

 

                         

조선팔도고금총람도    1673년제작된 지도 . 우리나라 보물.

겸재가 그린 인왕산과 한양도성의 북소문 / 창의문도, 정선(1676~1759), 1740년대, 비단에 엷은 먹.

무릇 나라의 수도는 중심에 있어야 / 조선팔도고금총람도, 김수홍(1601~1681), 1673년, 종이에 목판인쇄, 보물, 이찬 기증

이 지도는 김수홍이 만든 목판본 지도로, 조선 팔도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담고 있습니다.

한 장짜리 소축척 전국지도 위에 각 지역의 지리적 정보와 주요 인물, 역사적 사실 등 지리지에서

다룰 법한 내용을 함께 그려 넣었습니다.

특히 한양을 축척과 관계없이 한반도의 정중앙에 크게 그려낸 점이 눈에 띕니다.

이전 왕조의 수도가 한쪽에 치우친 것과 달리, 조선의 왕도는 나라의 중심에 자리해 균형을

이룬다는 서유구의 시구가 떠오르는 지도입니다.

 

조선의 왕도는 나라의 중심에 자리해 균형을 이룬다는 점을 강조 한 것 .

 

김정호 조선 1861 년 서울역사박물관. 보물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려낸 서울 지도 / 도성도<고지도첩>,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영남대학교박물관.

이 지도는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려진 도성도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줍니다.

도성 안의 궁궐과 관청, 도로는 간략히 기호화한 반면, 도성을 둘러싼 산줄기와 강은

마치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연상시킵니다.

도성 안에서 바라본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타락산(낙산)이 활짝 핀 꽃잎처럼

배치되어 왕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성 중심부는 항색으로 칠하고, 운종가에 길게 뻗은 시전(市廛)의

위치와 이름을 상세히 기록한 점이 특징입니다.

 

조운선으로 가득찬 한강을 그린 지도 / 한성전도, <고지도첩,古地圖帖>, 18세기 후반,영남대학교박물관.

한양도성 아래 경강(한강)을 가득 채운 배들이 보입니다. 곡식과 다양한

물건을 싣고 전국에서 모여든 상선(商船)들입니다.

이 지도는 한강변 나루터를 중심으로 상업이 번창했던 18세기 한양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한양이 상업 중심지로 변모하면서 일자리가 생겨났고, 많은 지방민이 서울로 이주했습니다.

이렇게 유입된 사람들은 도성 밖 강변에

마을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이 지도는 한강을 따라 서빙고, 용산, 마포, 서강 등

주요 나루터에 형성된 마을과 세곡 창고들을 보여줍니다.

 

 

시전행랑 가득한 서울을 그린 지도 / 한양도, <조선대동지도>, 19세기, 종이에 목판인쇄.

 

김정호가 만든 목판본 서울 지도 / 수선전도, 김정호(1804~1886), 1864년, 종이에 목판인쇄

이 지도는 김정호가 만든 목판본 서울 지도입니다.

제목의 '수선(首善)'은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의 구절 '으뜸가는 선(善)을 세우는 것은 서울에서 시작한다

(建首善自京篩始,건수선자경사시)'에서 따온 말로, 서울을 의미합니다.

<수선전도>는 목판에 새겨 찍어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좌측 하단의 간기(刊記) '甲子完山重刊(갑자완산중간)'을 통해 1864년 전주에서 다시 간행된 것을 알 수 있으며,

1840년대 초간본과는 달리 지도 여백에 과거 시험 정보가 기재되어 있어 과거를 준비하는

지방 선비들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도성대지도.  조선 1753 - 1760년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 중 하나.  서울 특별시유형문화유산.

조선시대 한양의 모습을 그린 가장 거대하고 자세한 서울지도이다.   단독으로 전시 중이다.

 

한 화면에 한양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낸 지도를 '도성도,都城圖'라고 합니다.

도성도는 왕이 거처하는 권위의 공간으로서 한양을 그려낸 동시에,

도성 내부의 지리 정보를 세밀하게 수록하였습니다.

궁궐과 관청, 행정 구역, 도로와 물길 등 도성 내부의 다양한 장소와 길을 묘사하고 있어

상업도시로 변모한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도성도는 아름다운 그림이기도 합니다.

18세기 중반 진경산수화가 유행하면서 아름다운 산수에 둘러싸인

한양의 모습을 그려낸 도성도가 제작되었습니다.

 

수백 갈래로 뻗은 길과 800여 개에 이르는 지명.

18세기 한양이 역동적인 상업 도시로 변모한 모습.

 

옷소매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의 지도를 '수진본(袖珍本) 지도'라고 합니다.

수진본 지도는 모두 펼치면 가로 길이가 2m에 달하지만,접으면 세로 10cm, 가로 6cm 정도로 작아집니다.

전국팔도를 각 도마다 8면씩 배정하여, 총 64면에 지리 정보를 수록했습니다.

도별 지도는 간략하게 그렸지만, 군사시설과 주민 수, 전답 통계, 역사적 사건 등을

함께 담아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구성했습니다.

18세기 전국의 명승을 유람하거나 과거 시험을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이들이 이러한 수진본 지도를 갖고 다녔으리라 짐작됩니다.

 

 

 

집 안 곳곳을 장식하던 그림 / 화조도, 19세기, 종이에 색.

 

장수와 부귀를 상징하여 널리 유행한 병풍 그림 / 곽분양행락도, 19세기, 비단에 색.

<곽분행락도>는 당나라 장군 곽자의(郭子儀, 697~781)가 호화로운 저택에서

가족과 함께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곽자의는 안녹산의 난(755~763)을 평정한 공로로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져 '곽분양'으로 불렸고,

당대 최고의 공신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는 아들 8명과 사위 7명을 두었으며,

자손들 모두 조정에서 중책을 맡아 세속적 성공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곽자의가 후손들과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담은 병풍 그림은 왕실 가례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길상과 기복의 상징으로

여겨져 광통교 그림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다남과 가정의 행복을 기원한 병풍그림.

 

상춘야연도 / 19세기, 비단에 먹과 색

이 그림은 마음 맞는 벗끼리 모여 술잔을 나누고, 시를 짓고 노래하던

조선시대 문인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습니다. 봄철에는 주점뿐 아니라, 도성 안팎의 계곡마다

유람객이 모여들어 봄꽃을 감상하며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활짝 핀 매화나무 아래서 벙거지 모양의 불판 위에 고기를 구워 먹고,

술잔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림 오른쪽 위에는 단원 김홍도의 자 '사능,士能'을 나타내는 인장이 있지만,

이는 김홍도의 양식을 따른 화가가 그린 그림에

후대에 찍은 것으로 보입니다.

 

 

전시의 3부 섹션은 ' 장소로 읽는 18세기 서울인데'  "세책점, 색주가, 약방  "을 연출하여

도시문화가 꽃 핀 18세기 서울을 그렸다.

 

 

<구운몽>은 김만중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소설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던

성진이 팔선녀를 만나 속세에 욕망을 품고,

양소유로 환생하여 부귀와 명예를 누리는 꿈을 꾼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일장춘몽의 내용을 통해 삶의 허무함을 되돌아보게 하여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구운몽>은 다양한 한문본과 한글본이 함께 유통되어 계층과 성별을 뛰어넘어 유행한 소설입니다.

 

 

술집

가뭄이 잦은 조선 시대에 술은 사치품이었습니다. 주식인 쌀을 빚어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성을 가득 채운 술집은 사치와 유흥을 즐길 수 있는 태평성대를 의미합니다.

'성시전도시'에서 한양 거리 곳곳을 밝힌 주등(酒燈)과 술집(酒家)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까닭입니다.

과장을 보탠 말이지만, 18세기 후반 한양은 열 집 중 한 집이 술과 음식을 파는 곳일 만큼

주점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특히 광통교 주변에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술집인 '군칠이집'이 있어, 19세기에는 '군칠이집'이 술집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구리개 약방

남대문로를 따라 종로로 올라가다 보면 지금은 을지로라고 부르는 동네, '구리개(銅峴)'를 만나게 됩니다.

18세기 구리개는 약방들이 밀집해 있어, 서울의 의료 문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약방은 약재를 판매하거나 의원의 진단과 처방을 받은 환자들에게

처방에 맞춘 약을 조제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는 의약이 상업화되면서 안과, 소아과, 부인과 등 전문화된 의원들이 있었고,

약을 조제하는 전문 약방이 성행하였습니다.

약방은 단순히 약을 만드는 곳을 넘어

한양의 최신 소식을 전하는 사랑방 역할을 하며, 사대부부터 한량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가도했습니다.

 

가련하구나 약을 파는 구리개 늙은이 두건 쓰고 한가로이 발 속에 앉아 있네

                -신관호의 <성시전도시, 1866> 중에서-

 

 

 

도성 안을 가득 채운 연등 / 전통 복원등, 한지에 조명, 연등회보존위원회

사월 초파일이 되면 한양 도성은 각양각색의 연등으로 가득 찼습니다.

집집마다 장대를 높이 세우고, 자녀 숫자만큼 등을 걸어 불을 밝혔습니다.

초파일 밤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되어 남녀노소 모두가 등불을 들고

나와 등불로 가득 찬 거리 풍경을 즐겼다고 합니다.

특히 광통교가 위치한 청계천은 연등을 구경하기 가장 좋은 장소였습니다.

4월 관등일에는 통금을 푼다네 세상이 환하도록 대나무 등간을 세우니

어지러이 떨어진 별이 꽃처럼 둘러싸서 거리마다 휘황한 불빛 온통 눈을 어지럽히고

수많은 사람 웃고 떠들며 시끄럽게 손뼉 치네

태평성대 성대한 일 더욱 우러러 보이고 바다같이 넓은 은혜는

순임금 우임금처럼 칭송 받네

- 신택권의 <성시전도시, 1795> 중에서 -

 

 

광통교는 한양에서 가장 큰 다리로, 폭이 길이보다 넓어서 '광통교'라 불렀습니다.

이 다리는 18세기 서울에서 가장 붐비던 두 길인 종로와 남대문로를 잇는

교차점에 위치해, 임금부터 걸인까지 한양 사람 누구나 마주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서화사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 시전에서 물건을 흥정하는 상인들,

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 주점에 들른 취객 등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이곳을 오갔습니다.

광통교는 여러 세시풍속이 펼쳐지는 공간이기도 해서,

정월 대보름에는 '다리밟기'를 하고 초파일에는 관등놀이를 즐기며, 겨울에는 연을 날리는 등

한 해의 즐거움을 만끽하던 장소였습니다

 

도자기로 읽는 18세기 서울의 소비문화

시전에서 유통된 물건들은 18세기 서울의 다채로워진 소비문화를 보여 줍니다.

백자는 생필품이자 사치품으로, 한양 사람들이 선호하고 동경했던 문화 중 하나였습니다.

18세기 후반에는 미술품의 소비계층이 왕실과 사대부에서 부유한 도시민으로 확장되면서,

다양한 문양을 장식한 청화백자의 생산과 유통이 활발해졌습니다.

특히 꽃이나 파초가 그려진 항아리와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길상문이 새겨진 그릇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사대부 취향의 사군자나 산수문과 달리, 길상문의 성행은 청화백자의 수요층이 다양해졌음을 보여줍니다.

 

 

'성시전도,이후, 한양의 도시 풍경을 묘사하고 기록하는 문화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에도 '성시전도'는 꾸준히 회자되며 새로운 창작에 활력을 불어 넣었고,

이를 통해 한양의 도시 풍경을 담은 다양한 장편 가사와 연작 시가 탄생했습니다.

어명에 따라 제작된 '성시전도'와 후대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태평성대의 도시 풍경에 숨겨진 서울의 또 다른 모습들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서울을 다각도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전시회로 현재 우리의

삶과 비교해 보면서 국민 모두가 바라는 태평성대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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