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4. 15. 22:19ㆍ역사 탐방
묘소에 들어서는 입구에 세워진 비석 두 기 중에 비각이 있는 비로서 숙종 19년(1693)에
세워진 것이며, 글씨는 김육이 쓴 것이다. 그 옆의 비는 5대손 이봉상의 신도비이며,
정조가 친히 지은 신도비는 봉분 안쪽 우측에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충무공 5대손인 충민공 이봉상은 이인좌의 난 때 청주성에서 반란군과 싸우다가 이인좌에 의해
항복의 권유를 받았지만 충무공의 후손으로 결국 충의를 지키며 순절하였다고 합니다.
이 신도비는 영조 22년인 1746년 이 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1597년 4월5일 을축 맑음
해가 뜰 때 길에 올라 곧바로 선산에 이르렀다. 나무들이 두 차례 들불로
불타고 시들어 차마 볼 수 없다. 산소 앞에서 절하고 통곡했다.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저녁 무렵 외가로 내려와 사당에서 절했다. 이어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서 곡하며 절했고, 남양 아저씨가 별세
하셨음을 들었다. 저물어서야 우리 집에 이르러 장인 장모님 신위 앞에서
절했다. 바로 작은 형님과 여필 제수의 사당에 다녀온 뒤 잠자리에 들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 작은 형님은 요신, 여필은 아우 우신 >
- 난중 일기 中 -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전투 도중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하자, 시신을 처음에는 노량해전의 전장이던 남해의 관음포에 임시로 모셨다가
이순신 재직 시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로 옮겼다.
그해 말(대략 음력으로 12월 즈음)에 시신을 육로로 이용해 아산[으로 운구하여
이듬해 선조 32년(1599) 2월 인근 금성산(음봉면 산정리 70-2)에 모셨다가,
이순신이 선무공신칭호를 받고 좌의정으로 추증되자 광해군 6년(1614)에
현재의 삼거리 어라산 자락으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후 정조 18년(1794) 영의정으로 추증되면서 정조가 어제신도비를 하사하였는데,
임금이 신하에게 신도비를 직접 내린 경우는 이순신이 유일하다.해방 이후인 1973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에 맞춰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조성하였다.

신도비를 지나며 이충무공묘소 입구로 들어서니 소나무가 울창하고 이른 아침이라
인적이 없어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비문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잠곡 김육 < 1580~1658> 이 지었다.
잠곡 김육은 종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황폐화된 국토를 복구하기 위하여
공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힘쓰기도 했으며 특히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이순신 < 1545~ 1598 > 장군의 무덤이다.
충무공은 무과에 합격하여 여러 직책을 거쳤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전라좌수사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충무공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를
훈련 시키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 노량, 당포, 한산도 등
여러 곳에서 적을 무찌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다가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을 맞고
숨졌으나, 사실을 숨기고 조카인 완이 대신 지휘하여 왜적은 큰 피해를 입고 도망을 갔다.
아산군 금정산에 무덤을 만들었다가 16년 후인 광해 6년 < 1614 > 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위에는 제사 지낼 때 음식을 차려놓는 상석과 혼이 놀다간다는 혼유석 . 향로석이
있으며 , 동자상 1쌍, 망주석 1쌍, 석상 1쌍, 문인석 1쌍, 광명등,묘비석이 있다.
무덤 앞에는 정조18년 <1794> 에 세워진 어제비와 비각이 있다.

묘소는 둥근 봉분으로 이순신장군과 부인 상주 방씨인 방수진의 합장묘로 조선시대 고관묘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본래 이순신 선조는 대대로 서울에 살았고 이순신 또한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외가가 있는
아산에서 자랐으며 또한 이순신의 처가가 충남 아산에 있었기에 아산에 묘를 마련하였다.
이순신의 처는 온양 방씨 방수진이다. 이순신의 장인어른인 방진은 양반가문으로
매우 큰 부자였는데 사후 모든 재산이 이순신에게 상속되어 아산에 자리잡은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