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16. 21:41ㆍ그림
화가 이중섭
1916년 평양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유학시절 운명의 여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를 만났다.
이중섭은 일본에서 천재 화가로 명성을 떨쳤지만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계속 머무를 수가 없었다.
1943년 혼자 귀국한 그는 그림을 그려 만든 100여 점의 엽서를 야마모토에게 보냈다. 사랑의 상징으로 염소 양 사슴 등을 그렸다.
1945년 미국이 일본 공습에 나섰을 때 야마모토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조선으로 건너왔다.
이중섭과 결혼한 그는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글 이름을 갖게 됐다.
어렵게 이룬 가정은 6·25전쟁으로 깨졌다
. 원산에서 부산으로 다시 제주도로 피란을 다니던 와중에 영양 부족과 질병으로 가족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이중섭은 가족을 일본으로 보냈다.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사흘마다 그림엽서를 그려 일본에 보내는 것으로 달랬다.
“사랑하는 사람은 함께 있지 않아선 안 되는데… 세상에서 제일로 소중한 사람, 나의 멋진 기쁨인 남덕…
당신과 아이들을 가슴 가득 채우고 힘을 내 제작하고 있고… 이제 한 고비만 참으면….”
이중섭은 ‘한 고비’를 넘기 위한 1955년 개인전을 실패했고 이듬해 9월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쓸쓸히 숨졌다.
1.3평 골방에서 해초로 연명했지만 네 식구가 함께 살아 행복했다고 그는 제주도 피란 시절을 회상했다.
2002년 제주 서귀포시에 ‘이중섭 미술관’이 건립됐다. 관람객들은 ‘게와 가족’ 등 그림 9점을 통해
이중섭의 ‘온 마음을 다한 사랑’을 느끼고 있다. (동아일보 200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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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1916-1956)
이중섭은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다.
이중섭은 평양에서 태어나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 일본 도쿄문화학원 미술과 재학 중, 1937년 일본의 자유 미협전에 출품하여 각광을 받고,
1945년에 귀국하여 원산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자, 그는 전국을 떠돌며 부두노동 등을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올라와
1955년 미도파 화랑에서 단 한 번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계속된 생활고와 가족들과의 생이별을 견디지 못하고,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40의 나이로 쓸쓸히 숨졌다.
그의 작풍은 야수파적인 강렬한 색감과 선묘 위주의 독특한 조형 등 서구적인 표현이지만,
향토적인 숨소리와 꿈을 표현하여 한국적이면서도 웅장하고 무한한 세계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의 소재는 주로 소, 닭, 어린이, 가족 등 일상성을 띠고 있으면서 시정이 넘치는 것들이다.
'소', '흰 소', '투계', '집 떠나는 가족', 그리고 담뱃갑 속의 은지에 눌러 그린 수많은 은지화들이
대표작들로 남아 있다.
그의 예술세계를 이루는 기반은 철저하게 자신의 삶으로부터 연유하고 있다.
생활고 속에서 처자마저 일본에 보내고 전국을 떠돌며 외롭게 제작한 고통의 산물들이었던
그의 작품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 새롭게 조명과 재평가를 받게 된다.
생전의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이 담긴 작품들로 인해,
그의 삶과 예술은 이제 대중적으로 거의 신화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그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닭·어린이[童子]·가족 등이 가장 많다. 불상·풍경 등도 몇 점 전하고 있다. 소재상의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는 요소와 동화적이며 동시에 자전적(自傳的)인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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