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2. 16:58ㆍ우리나라 이곳저곳
딸네는 애들을 데리고 아산스파비스로 가고 우리는 근처에 있는 문화제를 둘러 보기로 하였다.
여민루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유형문화제 제17호로 지정된 여민루가 있다.
조선시대의 아산리는 조선시대 아산현의 현청이 있던 곳으로 아산군 관아 입구에 세워졌던 문루인데 동향한 낮은 기단 위에 4각형의 주형 초석을 배열하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서 루마루를 설치하였다. 여민루는 아산현의 문루로 지어졌던 건물로서 현재 영인초등학교의 담장에 붙어 있다
지금의 여민루는 1834년에 다시 복원한 건물이다. 이곳은 빈객이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아산현감 최안정이 백성들의 도움을 얻어 객사 동편에 지은 것이다.
1415년 (조선 태종 15년) 아산 현감 최안정이 부임한지 3년만에 건립한 여민루다. 이름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호정공 하륜이 "취위민지의 (백성을 취하는 뜻을 취한다)" 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다고 한다
여민루의 정문의 태극무늬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보통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2색태극이 일반적인데 이 태극무늬는 황색이 하나가 더 들어간 3원 태극이라는 점이다.
우리민족은 원래 하늘(빨강), 땅(파랑), 사람(노랑)이라는 3원이 함께 어우러진 정신세계와 철학이 바탕이 된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어우러지고 움직이고 변화하는 가운데 우주와 만물의 근본을 조화시키는 원리이며
법칙이 3월 태극에 담겨져 있다.
향교
조선시대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1575년(선조 8)에 아산리 동쪽 향교골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고, 1864년(고종 1)에 중수하였다.
경내건물로는 대성전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2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향교에서 좀 덜어진 곳에 있는 석불 , 석탑이 고려시대의 것이라하니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개화와개혁을 주장하는 혁명가로서의 삶을 살다 간 김옥균의 묘.
한말의 정치가이자 개화운동가였던 고균 김옥균 1851~ 1894 )의 묘소이다.
일본 청산의 외인묘지에 있던것을 19249올11일 현재의 위치로 무덤을 옮겼다.
김옥균은 1870년부터 오경석, 유홍기등과함께 개화 사상을 익혀 승정원우부승지,
참의교섭통상사무. 이조참의 . 호조참관 외아문협관등의요직을 거치면서 나라의 자주근대화에 온 힘을 다하였다.
그는 자주 부강한 근대국사달성이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성취하는 길이라 믿고
정치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을 국가정책으로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에따라1884년 12월4일에 갑신정변을 단행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청나라군사 1,55명의 무력진압으로 ' 삼일천하' 로 끈ㄷ나고 말았다.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다시1894년에 중국 상해로 건너 갔다가 그곳에서 살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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