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2022. 5. 12. 00:00ㆍ우리나라 이곳저곳
경기도 남양주는 다산 정약용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후에 18년의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남한강이 굽어 흐르는 곳에 말년을 보낸 저택 여유당과 그 뒷편으로 묘소가 있다.
조선 후기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 송보, 호는 사암, 여유당이며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신유사옥 후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그는 피폐한 농촌사회의 모순에 관심을 갖고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에 대한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특히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를 통해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산은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에 가까운 인물로,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홍역과 천연두의 치료법에 대한 책을 내기도 했고, 도량형과 화폐의 통일을 제안했으며 건축기술인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했다.
문화의거리를 지나면 정약용 생가를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문화의 거리 조형물들.
정약용이 만들어 낸 거중기 .
수원 화성을 지을때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인부들을 보고 연구했다고 한다.
유배지에 집필한 책이 500권이 넘는다. < 꺼지지 않는 불 > 은 500권의 저서를
상징하는 조형물. 작품 박철우
여유당을 들어가는 입구.
글쓰기에는 없는 사진이 완료되면 어디서 들어왔는지 수정하려고 보면 없다.
어떻게 된 일알까 ?
생가 여유당을 들어가기 전 다산기념관과 문화관이 있다.
문화관은 정약용선생이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꿈꾸는 벤치
문도사 ; 정약용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견학 온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조용한 마당을 꽉 채운다.
당호란 옛사람들이 자기 집이나 거주지에 붙인 의미 있는 이름이다.정양용 선생은 ' 여유 ' 라는 당호를
노자의 < 도덕경 >에 있는 ' 머뭇거리기는 마치 겨울강을 건너듯, 두리번거리기는
마치 네 미웃을 두려워하듯 '이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개혁에 앞장섰지만
정치적 외풍을 막아주던 정조의 승하 이후 자신에개 닥친 위기를 직감했다. 즉 '여유'는 닥친 위기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에 대한 정약용의 다짐 내지는 각오였다.
여유당
안채 ; 검소한 생활이 엿보이는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정약용의 묘는 1762년 6월16일에 태어나 1836년 2월22일에 <음력> 세상을 떠났다.
여유당 뒷편 언덕에 부인 풍산 홍씨가 합장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또한,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 이들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이라는 것을 보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중 정다산은 그의 형 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천수를 다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본래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주옥 같은 저서는 바로 이 무렵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쓰여진 것이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곳 마재로 돌아온 그는 보속하는 뜻에서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 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