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능과건능

2023. 1. 9. 16:39우리나라 이곳저곳

197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장조는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소생으로 1736년(영조 12)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치싸움에 휘말려 영조의 진노를 얻어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영조가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배봉산(拜峰山: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초장한 것을 1789년(정조 13)에 정조가 이곳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하였다.

그 뒤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승격하였다. 혜빈 홍씨는 1815년(순조 15)에 죽어 그 이듬해에 현륭원에 합장되었다.

 

                                                                                    융능은

영조의 둘째 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장조(사도세자, 1735~1762)와 현경왕후(1735~1815, 혜경궁 홍 씨)의 합장릉이다. 사도세자는 이복형인 효장세자(추존 진종)가 요절하고 영조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태어난 두 번째 왕자다.

근처에 위치한 제22대 정조와 효의 황후 능인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팔경 중 제1경으로, 2009년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출중하다.

아버지의 죽음에 늘 애통해하며 지극한 효심의 정조였다.

국왕이 되자 비운에 간 아비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능을 이장하여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화성 융릉을 지었다.

누가 보아도 능 조영에 정성을 들인 정조의 효심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정조는 1800년(정조 24)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 부왕의 융릉을 조성했듯이 자신도 그 옆 조금 떨어진 건릉에 묻혔다.

건릉은 부왕 융릉과 구조적으로 거의 비슷한 형상이다. 

 

융릉은 정자각까지 두 사람이 걸을 수 있는 폭의 신도와 어도로 구분하였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해 사도세자의 고통을 충분히 보상하는 듯한 형상이다.

무엇보다 정자각은 능과 직선거리에 있지 않고

비켜있다.

이는 뒤주에 갇힌 아버지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융릉 비각

                                                            구비석: 조선국 사도장헌세자현륭원

                                        대한제국 1대 고종 광무3년<1899>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된후  만든비.

 

                                         

                                                          정자각 ;  제사지낼때 제물을 올리던 곳.

 

                                                       홍살문을 지나

                                             향로 < 좌,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 > 와

                                             어로 < 우, 왕이 걷는 길 > 약간의 높낮이로 정자각을 향해 있다.

                                   

                  

              사도세자의 삶을 생각하니 처절하고 애처롭기 짝이 없는 슬픈 인생이었다.

                    추모하는 마음이 깊어 황량한 계절에 찾았다가 슬픔이 더 진했다.

 

건릉;  조선 제22대  정조와 왕비 효의왕후 김씨의 능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나<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와

부인 효의왕후(孝懿王后) 김 씨(1753~1821> 영조 35년 세손이 되었고 영조 51년에는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며 , 영조가 승하하자 경희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재위 기간동안  탕평책을 실시하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제도를 정비 보안 하였으며

< 속오레의> , <대전통편> ,<홍제전서> . 편찬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재위 49세로 창경궁에서 돌아가셨다.

 

 

 

  건릉 비각 안의 비문 

‘대한 정조 선황제 건릉 효의 선황후 부좌’라고 쓰여 있는데, 나라 이름이 ‘조선’이 아닌 ‘대한’, 정조를 황제, 

효의왕후를 황후로 나타냈다. 광무 4년인 1900년에 만든 비석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정조를 황제로 추존하였기 때문이다.

(‘부좌(祔左)’는 부부를 합장할 때 아내를 남편의 왼쪽에 묻었다는 뜻임.)

 

 

 

 

 

고종이 사도세자를 사후에 장종으로 추존하여 융능에 장종과 부인인 혜경궁 홍씨 현경왕후와 합장하여 있고 건능은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가 합장하여 같이 있다

 

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정감 넘치게 조성된 단아한 모습으로 평온함이 물씬 다가왔다.

좌우로 노송들이 하늘 높이 솟아 숲을 이루고, 싱그러운 솔숲 사이로  고즈넉한 오솔길을 걷노라니

효심 가득한 정조의 정성이 느껴졌다.

마치 오늘을 예상이라도 한 듯 추모의 발걸음을 내딛는 후손에 대한 위로와 배려가 배어 있는 것처럼 따사로웠다.

 

 

건릉. 조선 제22대 왕 정조)를 합장한 무덤이다. 

조선 왕실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부르는 말이 다르다.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왕의 친부모나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은 원, 왕족과 후궁, 폐위된 왕과 왕비의 무덤은 묘라 부른다.

 

수은묘는 1762년 장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만든 무덤이다.

장조의 당시 신분이 왕세자였으므로 무덤 이름을 수은묘라 했다. 

 

1776년 정조가 왕의 자리에 올라 친아버지의 무덤을 묘에서 원으로 격을 높이면서 이름을 영우원으로 바꿨다. 

이때 무덤의 형식은 그대로 둔 채 이름만 바꿔 부르다가 1789년 다시 영우원을 이곳 화성으로 옮겨 와 

현륭원을 만들었으므로 현재 수은묘(영우원)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다.

 

 

 

 

 

 

문화관 맞은 편에 재실이 있었다.

재실은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참봉< 종9품 >등 관리가 이곳에 상주하면서 능역을 돌보았다.

주요시살로 재실외에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 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등이 있으며 단청은 하지 않았다.

 

                                                                                     다음에서 가져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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