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 황혼

2023. 12. 3. 20:18기억하고 싶은 시

 

 

 

 

 

 

내 골방의 커어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내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 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 십이월 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산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 푸른 커어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는 새 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이육사 시인은 목가적인 필치로 작품 활동을 한 시인(1904~1944).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윤동주한용운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유명하다.
주요 작품으로 <절정>, <광야>, <청포도>, <교목> 등이 있으며, 1946년 유고 시집인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이육사는 골방에서 시를 쓰다가 노을을 만났다. 붉은 빛 줄기가 얼굴에 쏟아져 내리는 느낌을 그는 입맞춤처럼 생각했다. 태양과 입맞춘 사나이는, 입술 위의 따스한 온기를 어딘가에 보내고자 하였다.
 
지구의 모든 곳에 있는, 괴로운 자, 외로운 자, 슬픈 자, 지친 자들에게, 노을 한 점을 보내, 위로하고 싶어했다. 

평생 식민지를 살다간 서럽던 시인이, 지금 분주함의 슬픔에 잠겨있는 내게도 황혼의 입맞춤을  나눠주고 있는 셈이다.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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