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29. 17:47ㆍ중국
진시황릉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 시황제의 묘지이다. 여산 또는 역산이라고 불리는,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 린퉁구 원산원에 있는 야산에 위치하여 있다. 기원전 246년에서 208년까지 38년간 공사를 했으며, 지금의 황릉은 야트막한 피라미드형으로, 시간이 지나며 그 높이가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76m라는 높이를 자랑한다. 진시황릉은 당시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의 모양을 본따서 만들어졌는데,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 있다. 외성의 둘레는 6.3km이고, 내성의 둘레는 2.5km이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산은 당시 내성이었던 부분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 발사하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하나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황릉 주위를 살펴보기 위해서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
첫번째 친황의 묘지(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는 중국 산시성(Shaanxi Province)에 위치한 중국의 역사적인 유적으로, 첫번째 중국 황제인 친 황제(秦始皇)의 묘소입니다. 이 묘지는 중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 많은 관광객과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다음은 첫번째 친황의 묘지의 주요 특징입니다:
- 건축물: 첫번째 친황의 묘지는 광대한 규모로, 다양한 건축물과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묘지에는 토벌된 동물들의 조각, 청동 병, 별도의 건축물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 토굴: 묘지에는 무려 수천 명의 근로자가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지하 토굴이 있습니다. 이 토굴에는 동적인 형상의 수많은 병사 조각들이 있으며, 친황제의 무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무덤: 친황제의 무덤은 지하에 있으며, 아직까지 오픈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국제 연구자들과 중국 정부 간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묘지의 많은 부분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으며, 무덤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 역사적 중요성: 첫번째 친황의 묘지는 중국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최초의 황제, 친 황제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중국의 다양한 왕조들과 문명의 기원에 대한 중요한 증거를 제공합니다.
- 관광 명소: 첫번째 친황의 묘지는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입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그 역사적인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합니다.
그 시대의 역사에 대한 조각된 그림들을 설명하고 있는 우리 가이드이다.
지하궁전은 어차피 모형인데 너무 어두웠다.
진시황능의 내부구조이다
문헌 그대로 천정은 천제를 본따서 일,성,월.진을 만들었고
지면에는 진시황제가 통일하였던 지역을 표시하였으며
중간에 진시황제의 금관과 부장품 및 순장시킨 궁녀들을 재현시켰다고 합니다
축소판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진시황능이 발굴 안된 상태에서
진시황능의 내부구조를 볼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할수 있다.
진시황제 관의 모형이다..
지하에 갇혀있던 백성들의 시신이다.
지하궁전을 쌓을때 일하는 백성들.
전국에서 모인 70만 명의 노동자들은 황제가 죽을 때까지 거대한 고분 안에 지하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그곳은 궁전과 제국, 세계의 진정한 비례 모형이었다. 무덤 도굴꾼들을 막기 위해 고안된 자동발사 무기가 무덤의 보물들을 지켰다. 진시황이 죽은 후, 지하 무덤과 관련된 주요 건축가들은 비밀 유출을 우려한 다음 왕의 명령에 따라 감금당했다. 진시황릉은 시안(西安)에서 35㎞ 떨어진 곳에 있으며, 43m 높이의 거대한 봉분은 지금도 주요 역사적 건조물이다. 능은 동서남북 기본 방위에 대응하는 네 개 각각에 문이 달린 최초의 정방형 담장 안에 지어졌다. 그리고 이 정방형 담장은 다시 남북으로 뻗은 더 큰 장방형 담장으로 에워싸여 있다.
관이 들어있는 매장실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기에, 현재 중국 고고학계가 주로 발굴, 조사하는 곳은 진시황릉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외성과 내성 부분이다. 또한 무덤 동쪽에 있는 병마용 또한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하기에 이 유물들만을 조사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한다. 병마용은 진시황을 사후세계에서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이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발굴되지 못하였다.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본기 편에 따르면 기원전 246년, 그가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진시황릉의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처럼 산 하나를 통째로 쌓아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난 후였다. 위치백과
진시황제 초상화
시황제는 왕권과 왕조의 기틀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능묘 건축, 만리장성 등에 대토목공사를 벌였다.
이와 함께 초호화궁전 아방궁을 쌓도록 해 국고를 탕진하는 등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다. 막대한 권력욕에 취한 황제는 영생을 위해 불로초를 구해오라는 명을 내려 대신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지방 순행 중 병고로 50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생전 황제가 누린 부귀영화는 덧없는 일장춘몽으로 끝났지만, 능묘의 군대 병마용과 함께 여전히 사후세계를 호령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