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3. 00:24ㆍ중국
큰길 옆에 있는 와룡사의 출입문은 절이라고 하기엔 수수했다.
들어서니 웬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지 가는 곳마다 북적인다 .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옆에서 툭 튀어 나온다. 워낙에 넓으니 내국인 관광객만으로도 만원이다.
중국불교 전래 초기인 한나라 건녕 원년(168)에 창건된 1,800년된 고찰이다
섬서성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수나라 때 '복응선원' 이라 불렸으며 당대에는 관음상이있었기에
' 관음사'라 불렸고 송대에 이르러 유과법사를 사람들이 와룡이라 불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송 태종이 '와룡사'라는 편액을 내린 데서 와룡사로 고쳤다.
와룡사는 문화혁명 이전부터 지식인들의 출입이 잦고 수행자가 많이 살았던 관계로
사회주의자들로부터 탄압의 표적이 되었으며 ,
문화혁명 당시에는 거의 모든 당우가 파괴되는 등 심한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그 당시 방장이었던 낭조스님과 지객이었던 원철스님은 심한 고문으로 인해 입적했다고 한다.
1984년부터 정부로부터 돌려받았으며 ,
대웅보전 등 전각과 당우가 복원되어 규모있는 사찰로 도량을 정비하였다.
문화혁명 때 파괴된 선방도 신축하고 , 현재 30여 명의 선객들이 수행하고 있다.
사찰 내부에는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관음보살의 벽화와 고승들의
벽화가 무척 인상깊은 절이다.
서태후가 의화단 사건으로 황제와 피신을 와서 머물렀던 당시 기부를 많이 해서 더 커졌다 한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불상을 모신 법당이 많았다.
다 돌면서 절을 한다면 다리가 많이 아플것 같다.
모든 사연들을 담은 촛불들은 주인의 소망은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타고 있다.
스님의 해맑은 미소가 와룡사의 얼굴 같은 생각이 든다.
절은 정말 넓다. 대지가 넓은것은 아니고 법당의 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