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9. 00:58ㆍ역사 탐방
4월20일 : 경복궁
인원 ; 42명
10시에 경복궁역에서 만나서 가기로 했는데 비가 내렸다.
천만 다행히 비는 세차게 내리지 않고 부슬비가 내려 다니는데 큰 지장은
주지 않았지만그래도 우산을 펴고 다니니 걸리적 거린다.
다른 단체도 보이고 한복을 빌려 입은
젊은이들은 비가 오는것도 아량곳 하지 않는다.
이 팜프렛은 중국의 자금성과 경복궁을 비교하며 설명하려고 선생님이 가져오셨다.
자금성의 크기는 동서 760m, 남북 960m로, 넓이가 72만 제곱미터(m²)다.
경복궁은 동서 500m, 남북 700m로, 면적은 43만 2,703 제곱미터(m²)다.
대략 자금성이 경복궁의 1.5배 크기라 할 수 있다.
자금성은 우리나라 경복궁보다 크지만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자금성 갔을때
가이드가 궁궐이 있는 곳에는 나무를 심지 않는 이유가 자객이 나무에 뒤에 숨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더니 경복궁에도 그렇다고 쌤이 말해준다.
경복궁은 담장도 낮고 건물도 몇 개 없어서 그렇게 작게 느껴지지만
경복궁은 원래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고종 때는 7,200칸에 달할 정도로 빼곡히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는데,일제 침략기를 거치면서 10%만 남아버렸다.
그리고 웅장한 건물들을 빽빽하게 가득 채운 자금성과는 달리, 경복궁과 다른 궁들은
자연과 건물이조화롭게 어울리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아마도 그래서 인위적인 느낌이 덜 묻어나서,산 속에 건물 몇 개 있는것 처럼 느껴지고
규모도 작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경복궁도 계속해서 옛 모습을 차츰차츰 복원해 나가고 있다. 이미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복원 정비 계획을 세워놓고있으니, 몇 년에 한 번씩 찾아가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때 쯤 되면 아마도 지금 우리가 보는 경복궁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 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맛보시기 바란다. (출처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에는 여러 전각들이 있는데 그 주인의 신분과용도에 따라 건물의 멍칭이 달라진다.
이를 등급에 따라 매기면 전殿 - 당堂 - 합閤 -각閣 - 재齋 - 헌軒 - 루樓 - 정亭의 순서라고 한다.
우리는 비도 피할겸 왼쪽으로 회랑을 따라 근정전 좌측 으로만 돌아 온다고 한다.
회랑 기둥의 받침으로 둥근것은 하늘을 의미하고 사각진것은 땅을 의미한다.
위치에 따라서 창문도 그 모양을 달리했다 한다.
경복궁 서남쪽에 있는 궐내각사로 가는 정문이었다. 흥례문 일곽은 정전 근정전 영역과 바로
붙어있었기 때문에 조회뿐만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 반포 등 여러 중요한 행사들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래서 궐내각사에서 근무하던 관리들이 원활히 움직일 수 있는 문이 필요했고
유화문이 바로 그 역할을 했다. / 나무위키
유화문 바로 옆이 기별청이다.
흥례문 서쪽 행각에 있으며 유화문의 북쪽에 있다.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인 승정원에서 매일 발행했던 ‘조보를 만들던 곳이다.
조보는 일종의 신문으로 지금의 관보같은 역할을 했다. 과거시험 날짜나 신하들이 올린
상소 및 그에 대한 왕의 답변, 그리고 조정 내 인사이동과, 외국 소식, 심지어 날씨까지
적히는 등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매체였다.
조보를 적은 종이를 ‘기별지(奇別紙)’라 했다. 기별지를 내는 곳이 바로 ‘기별청(奇別廳)’이다.
기별청 뿐 아니라 조보를 담당하는 몇몇의 관리들 역시 직책에 기별이란 이름이 붙었다.
매일 아침마다 각 관청에서 조보를 베껴 쓰라고 보낸 서리들을 ‘기별서리(奇別書吏)’라 했으며
지방에 조보를 배달할 전령을 ‘기별군사(奇別軍士)’라 했다. / 나무위키
근정전은 / 국보 223호 경복궁
궁궐 내의 으뜸 건물로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대관의 조회,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적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리다. 경복궁이 창건된 1395 < 태조4년 >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867년 중건되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근정문
남쪽의 흥례문을 비롯한 근정문 남쪽을 완정히 파괴하였고 ,1995년 조선총독부 철거이후 2001년
흥례문과 외행각 , 영제교등을 복원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근정전은 많이 봤으므로 내부는 보지 않고 지나쳐 사정전으로 갔다.
근정전과 그 앞마당 신하들이 품계에 따라 도열했던 곳이다.
품계별로 서야할 곳을 표시한 품계석이 있다.
바닥의 돌을 ' 박석'이라고 부르는데 비오는 날 배수를 원활히 하고 ,
미끄러지는 것을 막기위해 웅퉁 불퉁하게 만들었다.
권위를 상징하는 2단의 월대와 답도.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의 월대는 상하 2중으로 구성되었으며,
근정전 건물의 동서남 3면에 걸쳐 마련되었는데,
특히 남쪽의 정면 계단에는 상하에 각각 봉황새를 새긴 답도(踏道)를 두고
층계석에도 당초무늬를 새겼다.
또한, 상하 각 월대의 가장자리에는 돌난간을 사방에 두르고 난간기둥 머리에는
십이지(十二支)에 해당하는짐승조각을 새기었다.
근정문에서 근정전으로 이어지는 삼도가 끝나는 자리에 근정전 월대로 오르는
계단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돌이 비스듬이 박혀있는데 이를 답도라한다. 글자대로라면
밟고 가는 길이란 뜻이지만, 실제로는 답도의 전면에 구름 속에서
봉황 두마리가 노닐고 있어 올라가는 길이 아니다. 또한 함부로 밟아서도 안되는 길이었다.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이는 임금만이 다니는 어도이다. 임금도 가미를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밟고 올라가지는 않았다.
근정전 옆면
[보물 제 1759호 경복궁 사정전]
사정전은 왕이 평소 기거하면서 정사를 보던 집무실인 편전으로 매일 아침 업무
보고를 위해 왕을 배알하는 상참 맟 경연 , 윤대등의 국정이 펼쳐진 곳이다.
근정전 뒤 사정문 내 중앙에 위치하며 , 동쪽에는 만춘전 , 서쪽에는 천추전이 같이 있다.
사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건물을 1867년 중건하였다.만추전은 한국전쟁때 소실된
것을 1988년 복원하였다.천추전은 경복궁 중건 시인 1867년 건축돵 것으로 보인다,
사정전의 내부
현판 글씨는 경복궁 중건 당시 이조참의였던 정범조(鄭範朝, 1833 ~ 1898)가 썼다.
만추전은 사정전 동쪽에 위치해 사정전의 보조적 역활을하던 전각이다.
서쪽의 찬추전과 같이정치 영역의 역활을 하던 곳이다. 사정전은 왕이 평상시 거처하며 정사를
보살피던 곳으로 근정전에서 뒤편으로 사정문을 지나면 정면에 위치하며,사정전의 동측으로
만춘전과 서측으로 천추전이 있다. 사정전에는 온돌이 없고 만춘전과 천추전엔 온돌이 있어
추운 겨울에는 만춘전과 천추전서 정사를 보고 경연을 했을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으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사정전은 박애관,
만춘전은 경비실, 천추전은 심사실 등으로 개조되어 사용되었으며,
그 후 6.25전쟁으로 만춘전이 파괴되었다가 1988년 다시 복원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금천교 < 영제교 >
흥례문괴 근정문 중간에 노ㅛㅎ여진 금천교 외부와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한 풍수지리적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경복궁이 창건 될때 만들어졌으며 세종 대에 영세교라 칭했으며
임진왜란 시 경복궁이 폐허가 되었으나 이 영제교는 돌로 만들어져 큰 훼손없이 남아
현존하고 있으며 외부에서 물을 끌어오는 방식의 인공개천이다.
천록은 《후한서》 - 영제기에 나온 상상의 동물인데, 요사스럽고 나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즉, 외부의 잡귀를 막는 상징적 경계인 금천에
사악하고 나쁜 것을 물리치는 동물인 천록을 둠으로써 궁궐의 신성함을 더욱 돋보이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지 4마리의 천록 모두 금천 바닥을 마치 감시하듯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나무위키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 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대표작이다.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인공섬을 만들어 조성한 누각으로,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회루는 창건 당시에는 작은 누각이었으나 ,
1412 < 태종 12년 > 에 연못을 확정하고 누각도 큰 누각으로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년이 지난 1867 < 고종4 년 > 겅복궁
재건시 중건하였다. 연못 속에는 잘 다듬어진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를 세웠으며 ,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자선당
왕세자와 세자빈이 머무는동궁의 처소이다. 세자는 떠오르는 해와 같이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이므로 근정전의 동쪽에 배치하였다.
흠경(欽敬)이란 『하늘을 공경하여 공손히 사람에게 필요한 시간을 알려준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는 흠경각에는 시간을 알리는 천문기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세종은 나라의 근간인 농업 발전을 위해 천체의 운행을 이해하고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고자 하여 장영실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대소간의(大小間儀, 천체 운행 관측),
혼의(渾儀, 천문 관측), 혼상(渾象, 별의 위치 표시), 앙부일구(仰釜日晷, 해시계), 일성정시
(日星定時, 태양과 별의 위치로 보는 시계),
규표(圭表, 태양의 시차 관찰), 금루(禁漏, 물시계) 등 정교한 관측기구를 만들었지만
이 기구들은 후원에 설치되어 시간마다 점검하기 어려웠으므로 이에 장영실로 하여금
따로 천추전 옆에 흠경각을 마련하여 이를 모아두고 세밀히 관찰하도록 하였다하며 또한
흠경각은 국가적 표준시를 정하기도 했는데 흠경각의 시계가 시간을 알리면 광화문과
영추문 등에서 이를 받아 북이나 종을 쳐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위치와 연혁 : 강녕전 남쪽 행랑의 전각문이다. 사정전에서 강녕전으로
가려면 이 문을 들어서야 한다.
1867(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만들었다.<원전 4>
뜻풀이 : ‘향오(嚮五)’는 ‘오복을 향함’이라는 의미다.
‘향(嚮)’은 ‘향하다’, ‘오(五)’는 ‘오복’으로 풀이된다.
『서경』 「홍범」편의 ‘향용오복(嚮用五福)’에서 왔다.
「홍범」에서는 하늘이 우왕(禹王)에게 홍범구주, 즉
세상을 다스리는 아홉가지의 큰 법칙을 내려 주었다고 하였는데,
오복은 그 중에 하나로 제시되었다.
아홉 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오행(五行) 4)이고, 다음 두 번째는 공경하되 오사(五事) 5)로써 함이요,
다음 세 번째는 농사(農事)를 짓는 데 팔정(八政) 6)을 씀이요,
다음 네 번째는 합함을 오기(五紀) 7)로써 함이요,
다음 다섯 번째는 세움을 황극(皇極)으로써 함이요,
다음 여섯 번째는 다스림을 삼덕(三德)으로써 함이요,
다음 일곱 번째는 밝히는 데 계의(稽疑)로써 함이요,
다음 여덟 번째는 헤아림을 여러 조짐[庶徵]으로써 함이요,
다음 아홉 번째는 향함을 오복(五福)으로써 하고 위엄을 보이기를
육극(六極)으로써 하는 것이다.”<원전 5>
채침은 이 가운데 오복과 육극을 두고 “복(福)과 극(極)은
사람이 감동함에 하늘이 응하는 것이다.…(중략)…
오복을 향(嚮)이라 한 것은 권면하기 위한 것이요, 육극을
위(威)라 한 것은 징계하기 위한 것이다.
”<원전 6>라고 풀이하였다. / 출처 : 문화재청
강녕전
임금의 정식 침전이다.
근정전 북쪽에 위치하며, 우물정 자 모양으로
9개의 방을 만들어 왕은 중심방을 이용하고 주위의 방에서는 상궁이 숙직을 하였다.
1394년(태조 3년)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져, 세종 15년 수리, 명종 8년에
화재로 사라진 뒤 재건되고,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에 다시 지었는데,
고종 13년에 다시 화재를 입은 것을 고종 25년에 재건하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불타 없어진 창덕궁 내전을 재건할 때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전 건물을 자재로 쓰기 위해 해체 이전 지금은 희정당이 된다.
이후 빈 터로 80년 가까이 남아있다가 199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강년전과 교태전은 다른 전각과 다르게 용마루가 없다.
용마루는 지붕 꼭대기에 기와를 겹쳐 한 줄로 쌓거나 , 흰빛이 나는 단단한
흙으로 마감한 것을 말한다.
교태전을 들어가는 문은 6쪽으로 되어 있어 쉽게 열리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교태전은 왕비의 참전으로 1440년 < 세종 22년 >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1867년에 중건했으나 1876년 < 고종 13 > 화재로 재소실,
1888년 < 고종 25년 >에 중겅하였다. 강녕전과 함께 1917년 창덕궁의 화재로 대조전이
소실되자 복원 명목으로 1918년 헐렸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4년에 복원되었다.
함원전은 교태전의 부속 건물이다.
『원기를 간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함원전은 교태전 서쪽에 있는 건물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불교행사를 주로 행하던 이채로운 건물이다.
건축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세종실록에 세종 때 지은 건물의 명부에 있으므로
세종 때 지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경복궁 중건 때 다른 건물들과
중건되었으나 1917년 창덕궁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침전인 대조전과 희정당,
경훈각 등이 소실되었는데 화재 후 건물을
복원하기위해 당시 비어 있던 궁궐인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함원전 일대의 건물들을 헐어 강녕전과 교태전 함원전에서 나온 목재로 지금의
창덕궁 희정당, 교태전, 경훈각, 함원전 등을 지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이곳의 목재로 지은 창덕궁 함원전은 대조전 뒤편에 있으며 현판은 달지 않았습니다
곤녕합의 부속 건물인 옥호루는『옥병안의 얼음』이란 뜻으로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는데 1895년 곤녕합 옥호루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으니 일본 자객에
손에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으로 이 사건을 을미년에 일어났다하여
“을미사변”이라고 합니다.
건청궁
경복궁의 북측 후원으로 가는 도중 향원지 뒤에 있는 궁궐속의 궁으로
경복궁 중건 시기보다 6년 늦은1873년 지어졌으며 처음에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가
고종과 명성황후 거처로 사용되는가 하면 고종은 이곳에서
정사를 보기도 하였고 각국의 공사를 만나는 접견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깃불을밝힌 곳으로 그 결과
전기의 역사는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앞서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건청궁은 1895년10월8일 을미사변으로 인해 명성황후가
일본 애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살육의 현장으로
바뀌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인 1896년 2월 왕세자와 함께
궁내용 교자를 타고 바로
신무문을 통해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해
1909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헐려 사라졌으며 대신 그 자리에는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으며
이후 이 미술관은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철거된 후
건청궁 복원은
2004년 6월에 시작돼 3년여 만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교태전 뒷편에는 아미산 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는데 계단식 화단과 학, 박쥐,
봉황, 소나무,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 여러가지 무늬의 6각 장식 굴뚝이
< 보물 811호 > 조화롭게 비치되어 있어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그 옛날이라면 후원을 거닐던 왕비의 노고를 달래주려 예쁜 모습의
모란이 피었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아직도 넓은 궁궐 잔디밭 터는 궁궐터로 앞으로 궁궐이 복원되어 들어설 자리라 한다.
경복궁의 일부만 보고 나왔다 한 번에 다 둘러보기는 힘들것 같아서 그러셨나 보다.
동십자각
광화문과 이어진 담장 동서쪽 끝 모서리에 있던 망루로 서십자각은 아예 사라져버렸고
동십자각만 도로 위에 홀로 남아 있다.법궁에 걸맞은 격과 위엄을 갖춘 광화문은 일제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한 나라의 국권과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며 굳건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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