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2024. 6. 23. 16:19역사 탐방

 

 

관람료 (단체는 20명 이상 적용)

 

ㆍ어른 3000원, 단체 2400원

   청소년 1500원, 단체 1200원

ㆍ어린이 1000원, 단체 800원

ㆍ군인 1500원, 단체 1200원

ㆍ무료 - 경로우대자 65세이상, 6세이하 유아, 장애인, 국가보훈대상자

 

 

 

 

 

서대문 형무소는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의 독립 투사와 해방 이후 군사 독재 시절의 민주화 운동가를 수감하였던

과거 악명 높았던 감옥이자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며, 1987년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으로

이전하기까지 사용되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이기도 하다.

크기는 부지 19만 8,348m2, 연건축면적 26,446m2, 수감 가능인원 3,200명. 지금의 역사관은

당시 부지 중 일부만을 재보수 및 복원해놓은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구성은 출입문 바로 앞으로 보이는 전시관, 바로 뒤로 중앙사,

그리고 제9~12옥사와 공작사, 한센병사, 추모비, 사형장, 시구문, 격벽장, 여옥사(구 유관순 지하감옥),

취사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취사장은 건물이 부족해서 그런지

기념품 가게와 같은 건물에서 전시되어 있다.

 

 

 

 

 

 

 

 

 

1910 ~ 1945년   .  독립운동 .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은 더욱 집결하여 국내외에서 치열한 저항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역량의 결집으로 1919년 , 전 민족이 참여한  3. 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되었다.또한 국내외 각지에서 비밀결사 조직과 독립군 등의 활약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으며, 세계만방에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천명하였다.

이러한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제국주의 침략에 유린당했던 자유와 평화를 되찾기위한  인도주의적인 

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지하로 내려서니 컴컴한 공간에 고문했던 그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재현시켜 놓은 전시관

고문실이 있었다.전시관 지하 고문실에는 밀랍인형으로 고문을 받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재현한데다가, 당시 일본 제국이 자행하던 고문의 잔혹함을 보여주는데

고문실 자체가 지하에 있어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견학하러 온 어린 학생들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줄 정도이며 여성 독립지사를 고문 장면을 재현한 데에는 처절하게 음성까지 들린다.

센서라지만 무섭다. 

 

 

 

 

물고문. 

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집어 넣거나 , 코나 입에 물을 마구 들이 부어 호흡을 곤란하게 하여 

고통을 주었던 고문 방법.  심지어는 페에 물이 차서 흉먹염에 걸려 매우 고동스럽게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상자 고문

상자 안쪽에 날카로운 못을 박아 놓고 사람을 상자 안에 집어 넣어 

마구 흔들어 못에 찔리게 하여 고통을 주었던 도문도구.

 

 

대부분의 감옥은 옥문을 닫아놓았지만 몇 개는 열어놓아서, 유관순이 수감되었던 8호실 등의 3평 남짓한 옥내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단, 유관순 지하감옥은 완전히 막아놓았는데, 유리로 막아놓았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조로 내부를 관찰할 수 있다.

대부분의 감옥은 3평에서 5평 정도로 운신의 폭이 있지만 지하감옥은 독방이라 그런지 한평 남짓한 좁은 내부를 가지고 있다. 갇혀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옥고를 짐작하게 할 수 있을 만한 구조이다. 서대문형무소 역사전시관과 중앙사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개조해서 영상실, 기획전시실, 자료실, 옥중생활실, 임시 구금실, 고문실 등으로 당시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 놓았고, 나머지 7개 동의 옥사 중 제 10, 11, 12 옥사는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어 있다.

 

 

벽관

옴짝달싹 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고문기구 벽에 서 있는 관이라하여  " 벽관 "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2~3일 동안 갇혀있으면 전신마비가 온다는고문실인 벽관도 재현해 놓았는데, 이것도 정말 무섭다.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인해 수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수용되었다. 특히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유관순(柳寬順, 1902∼1920)

등이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양한묵·강우규·안창호·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된 곳이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재소자에 대해 정해진 작업, 정량의 식료품 배급,

교육과 운동에 대한 교정 규정을 가졌다. 그러나 실제로 형무소에 투옥된 독립운동가에게는

형기가 확정되기 전부터 온갖 취조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또한 옥사 내에는 겨울철에 난방이 되지 않아 동상을 입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며

동사(凍死)하는 일도 빈번했다.

여름철에는 각종 전염병으로 병사자가 속출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처우가 가혹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정치·사회문제로 관련하여 간첩 및 사상범이 많이 투옥되었다.

특히 운동권학생과 재야인사 등이 투옥되어 민주화운동의 성지(聖地)로 이해되기도 한다.

함석헌(咸錫憲)·유달영(柳達永) 등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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