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탐방 , 독립문

2024. 6. 20. 15:35역사 탐방

 

 

5월 25일 

인원 34명

 

                                        독립 선언문

 

 

서재필 동상

서재필선생은 1896년 4월7일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을 발간하였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으며 종래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으로 고치고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또한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 요구를 반대하는 등 국민의

독립사상과 민권 사상을 크게 신장시켰고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구미위원회를 설치하자 그 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독립문을 세운 서재필을 기념하기 위해 1990년에 언론관련 단체들이

총집결하여 건립한 동상이다.

독립문 바로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언론관련 단체들이 건립을 주도한 이유는,

서재필은 독립문만을 세운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첫 근대적 신문인 독립신문

1896년에 간행하였으므로 우리나라 언론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적으로는 가장 연원이 오래된 건물로, 공원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의 이름은'모화관(慕華館)'으로 1407년 조선 태종 때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세운 영빈관 역할을 하던 곳이었는데, 구한말에 조선이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단절하면서 그 목적을 잃었다. 목적을 잃은 모화관은 이후 독립협회

설립되면서 그 본사 역할을 하게 되어 이름을 '독립관'으로 변경하였으나, 일제가 이 건물을

대한독립을 부추기는 불온 시설로 간주하여 결국 강제철거되었다  원래의 위치는 현재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300m 정도가 떨어진 곳이었다.

지금의 건물은 서울특별시가 1996년에 현충시설의 하나로서 복원한 건물이며,

현재 순국선열들의 위패 봉안 및 전시실로 사용중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화환도 보인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를 기리기 위해 2021년에 설치한 동상이다. 

 

                                                                                                   

 

3.1독립 선언 기념탑이 있다. 1919년 3월 1일 33인의 민족대표들이 서울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 만세를 삼창하며 거족적인 3.1 독립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3.1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국민의 성금으로 1963년 탑골공원에 건립되었으며

1992년에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옮겨 왔다.

 

 

                                          만들 당시 생존 독립지사 서른분이 남겨주신 소중한 족적

 

 

 

 

 

독립문 또는 서울 독립문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1896년부터 1898년에 걸쳐 완공된 기념문이다.

양식은 유럽식 개선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문의 기능을 수행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기념 목적으로서 만든 것이다. 크기는 높이 14.28m, 너비 11.48m이다.

디자인은 서재필이 담당했다.

본래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로 독립협회가 건축하였다.

이전에는 영은문이 있던 자리였으나 청나라가 유럽 열강에 의해 반식민지화되면서

독립협회가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일본의 도움으로 조선이 청의 속국에서 벗어났다'는 

조선총독부의 프로파간다에 활용되었으나, 당대 한인들 사이에서는 일본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상징하는 문으로도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현재 독립문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건립 당시의 위치(구 영은문 위치)는 아니다.

원래의 위치는 현재의 독립문역 사거리 중심부에 해당하며, 금화터널 사직터널을 잇는 현저고가차도 공사를

위해 원래 위치보다 서북쪽으로 70미터 정도 들어 옮겼다.  / 나무위키

 

독립문.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청은 이 전쟁에서 패전하고 말았다.

이듬해에 청일 간의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훼손하는 조공관계의 폐지를 선언하면서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했다.

이제 조선 내부에서도 청나라와의 관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조선 국왕이 직접 나가 칙사를 맞이하던 영은문이 훼철되었다.  /  다음백과

 

1917년 수리공사를 했으며 1928년 기초가 무너질 위험이 있어 조선총독부에서

공사비 4,000원을 들여 벽체 안쪽을 철근 콘크리트로 보강했다. 1979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해 원래 자리에서 70m 떨어진 지금의자리로 옮겼다.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긴 동판이 묻혀 있다.

독립문 앞에 영은문의 석재 초석이 있는데 이는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원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유적으로, 원래는 1536년에 모화관 근처에 중국 사신이

지나는 관문으로 세운 영은문의 기둥이었다. 막상 보면 두 개의 기다란 오벨리스크 같은

기둥만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1895년에 조선이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단절하면서 그 기념으로 영은문을 철거하고

그 기둥만을 남겨버렸기 때문이다.현재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1년에 명칭변경을 거쳐 '서울 영은문 주초'라고 부른다.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다. 영은문은 상징적인 관문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관문이었으므로 지금의 통일로인 의주로 위에 있었는데,

1979년에 성산로에 고가차도를 준공하면서 현저고가차도를 만들 때 그 아래에

사적지를 둘 수가 없다보니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서재필 중심의 독립 협회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국민의 헌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1897(광무 1)년에 세운 석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사적 제32호이다

 

 

독립문에 앞면 과 뒷면의 글자.  한자와 한글

독립문의 편액 글씨를 누가 썼는가에 대해선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이완용이 썼다는 것과
둘째는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이 썼다는 것이다.

 

 

 조선 태종 때인 1407년 국왕이 명나라에서 내려오는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서 세운 영은문.

그 옆에 모화관이 있었는데  < 아래 사진 가운데 기와집 > 국왕이 모화관에서 명 사신을 맞는 

의식을 행했다.  그러한 관행은 청나라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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