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3. 12:17ㆍ기억하고 싶은 시
님의 침묵
- 만해 한용운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는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기에 만날때는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품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 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 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은 휩싸고 돕니다.
생애;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어릴 때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또는 1897)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주에서도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 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했으며,
1908년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저지했다.
1913년 박한영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했고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어느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진리를 깨우쳤다고 한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 惟心〉을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인 1922~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으며,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6년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심우장)에서 중풍으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사랑하는 까닭
한 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