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20. 15:51ㆍ성지 성당
친구 부부가 강화 갑곶성지를 가자고 해서 이 더운 여름에 집을 나섰다.
박순집 베드로(1830~1911)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모의 도움으로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의 심부름꾼이 되기도 하며 주교님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박순집은 25세에 그의 부친과 같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브르뜨니에르(白) 신부, 보리외(徐) 신부, 도리(金) 신부, 프티니콜라(朴) 신부, 푸르티에(申)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이 3월 7일과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박순집은 군인으로 참여되어 이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박순집은 아버지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3월 28(음) 시신을 찾아 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4월 14일(음)에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진 정의배(마르코) 회장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1889년에는 인천에 사는 한 교우가 박순집을 찾아와서 인천 제물포(濟物浦)로 내려와 전교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자 1890년에 전교의 원대한 포부를 간직하고 아들 식구와 전 가족을 데리고 제물포로 이사했다. 박순집이 제물포에 와서 근교에 교우를 살펴보니 자기를 인천으로 초대한 교우 가정과 또한 가정, 일본인 교우집, 중국인 한 사람이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베드로는 1889년에 한국인 59명, 일본인 25명으로 설립된 답동본당(초대 주임 빌렘 신부) 사목을 도우며 전력을 다하여 전교에 힘썼다. 그런데 1893년에 박순집의 집터가 경인 철도 부설로 인하여 철도 부지로 편입되어 부득이 외곽지역인 주안 숙골(현 도화동)에 밭을 사서 이주하여 생활을 하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선종 하였다.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 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박상손(朴常孫)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돈대(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십자가의 길 /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터 각자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를 가지고
태어나는 건 아닐까 ? 그렇다면 기꺼이 그 십자가의 무게를 감수하며
가야할 것이다. 가끔은 불평도하고 투덜거리면서..
제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합시다.
성지 본당은 공사중이라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지하성당 입구.
지하성당의 내부.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도 미사 온 신자들이 많았다. 우리는 시간을 못 맞춰 미사는 드릴 수 없었다
그렇지만 평생을 순교자들을 지켜보며 뒷일을 열심히해 온 그래서 증거자로써의
한 몫을 한 박순집 베드로의 값진 삶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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