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3. 12:16ㆍ우리나라 이곳저곳
한국사에서 최초로 문집을 간행한 여성 시인이다. 다만 본인 생전에 본인이 간행한 것이 아니며, 동생인 허균이 간행한 것이라 조선 시대부터 조선과 중국 양쪽에서 표절 시비가 분분한 논쟁적 인물이기도 하다.
허난설헌은 문장가문에서 성장해 어릴 때에 오빠 봉과 동생 균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 균에게 시를 가르쳤던 이달(李達)에게 한시 수업을 받았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안동(安東) 김씨(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했으나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기녀들과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고독한 삶을 살아야했다.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에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 가는 비극이 연속됐다.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한시로 슬픔을 달래며 불우하게 살다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허난설헌의 생가
哭子(곡자)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허난설헌기념관
조선시대에는 딸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시대였지만 오빠 허봉은 동생 난설헌을 위해
친구 손곡 < 이달 >에게 시를 배우도록 해주었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였던 손곡 이달은 서얼로 태어나 당시 사회제도적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고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당시풍의 글을 썼다.
허난설헌은 이달에게서 자유분망한 성격을 지닌 당나라 시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 당시
며성으로 체험할 수 없던 사회 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키웠다.
낭만시 대표작 < 채련곡> 의 정서와 넘치는 사랑은 허난설헌의 여성적인 섬세한 감정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허난설헌이 그린 그림으로, 낯익은 풍경과 어린 여아의 모습이 한 장의 풍속화를 보는 듯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