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14. 15:43ㆍ중국
둘째 날 1
시내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리 산(骊山) 일대는 알아주는 온천 지대다. 3,000년 전 주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 황제와 조정 대신들이 애용했던 온천이자, 당나라 6대 왕이었던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로맨스 무대였던 화청지가 유명하다. 747년에 현종은 온천을 좋아하는 양 귀비를 위해서 이곳에 대규모 공사를 실시했다. 온천을 확장한 것은 물론, 새로이 궁전을 짓고 궁전 주변을 성벽으로 둘러싸 ‘화청궁(华清宫)’이란 별궁을 완성했다.
양 귀비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힌다. 그녀는 현종보다 35살이나 어렸고, 심지어 현종의 18째 아들인 이모의 부인이었다. 그러니까 시아버지였던 현종이 며느리의 미모에 반해서 부인으로 삼은 것이다. 호사가들은 중국 역사상 둘도 없는 태평성세를 구가하던 당나라가 멸망한 이유 중 하나는, 현종이 양 귀비에게 눈이 멀어서 정치에 해이해져서라고 말한다.
지금도 매일 43℃의 온천수가 120톤씩 샘솟는다는 화청지에서 그녀는 온천을 즐기며 매끄러운 피부를 항상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 현종과 양 귀비가 사용하던 온천탕이 그대로 보존되어 여행객을 맞이한다. ‘연화탕(莲花汤)’은 현종이, ‘해당탕(海棠汤)’은 양 귀비가, 그보다 먼저 만들어진 ‘성진탕(星辰汤)’은 태종인 이세민이 애용했다.
왕이 사용하던 온천 유적 오른쪽에 주룽 호(九龙湖)라는 호수가 있다. 푸른 물 위로 호숫가 풍경이 반영되어 제법 운치가 있다. 사이사이로 당나라풍 정자와 회랑이 이어지고, 양 귀비의 백색 석상이 눈에 띈다. 북쪽에 있는 비상전(飞霜殿)은 밤낮으로 미모를 가꾼 양 귀비가 현종을 침실로 이끌었던 둘만의 처소다.
한편, 화청지는 중국 현대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 시안 사변(西安事变)의 무대이기도 하다. 1936년 국민당 당수 장제스의 부하였던 장쉐량이,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하며 일으킨 일종의 쿠데타가 시안 사변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맺어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전쟁을 수행했다. 중국 역사에 있어 중요한 장소이다 보니 화청지는 중국 단체 여행객으로 늘 붐빈다.
양귀비는
중국 당나라 현종(712~756 재위)의 귀비. 현종이 그녀에게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자 잇달아 반란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당조(618~907)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유명한 중국 시와 희곡의 주제가 되어왔다. 고관의 딸이었던 그녀는 중국 역사상 절세의 미인으로 통했다. 처음에는 현종 아들의 비였으나 그녀에게 매혹된 60세의 현종은 아들에게 그녀와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사촌오빠인 양국충이 재상이 되었고, 돌궐족 출신의 젊은 장군 안녹산은 양귀비의 득세를 등에 업고 권세를 누렸다. 그녀는 그를 양자로 맞아들였는데 실제로는 연인 사이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군통수권을 갖게 된 안녹산은 양국충의 권세를 질투하여 황제를 배반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756년 반란으로 인해 현종과 황실은 피신했고, 도망 중에 황제의 친위병들이 양귀비와 양국충을 처형했다.
양귀비가 온천탕으로 들어가는 이 모습에 현종이 반했다고 하는데 그때 양귀비는
키 155cm에 체중이 65kg였다는데 그때 미인이 기준이 그랬나 보다.
연화탕은 현종과 양귀비가 함께 사용하던 온천탕. 관리들, 주방에서 음식하는 사람들의 탕도 다 따로 만들었다.
이제는 사진 찍기 싫다는데 남편이 찍어 준다고 자꾸 찍으라며 찍어 준 사진이다.
안록산의 난
안록산(安祿山)은 서역인이었으나 현종의 총신으로 평로(平盧), 범양(范陽), 하동(河東)의 절도사로 황하 이북의 군권을 장악하였다. 안록산은 현종이 향락에 빠져 있는 사이 재상 양국충(楊國忠)을 징벌한다는 구실로 난을 일으켜 낙양을 점령,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라고 일컬었다. 현종이 성도로 급히 도망하는 도중, 마외(馬嵬)역에 이르렀을 때 장수들간의 분쟁이 발생, 양국충이 살해되고 양귀비는 목매어 자살하도록 하였다.
안록산은 장안을 점령하고, 현종은 성도에서 태자 이형(李亨)에게 양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숙종이다. 숙종은 곽자의(郭子儀), 이광필(李光弼)을 대장으로 기용, 반군을 공격하였다. 이때 반군의 내부분열로 안록산은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피살되고, 부장 사사명(史思明)은 당에 투항, 안경서를 살해함으로써 당군은 장안, 낙양을 수복하였다. 뒤에 사사명은 다시 반군을 이끌고 낙양을 점령하였으나 역시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피살됨으로써 당은 낙양을 수복하였고, 사조의가 자살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이 난은 8년간 지속되었고 '안록산의 난'이라고 한다.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