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9. 11:30ㆍ기억하고 싶은 시
언제든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 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본향으로
아이들이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뻐꾹채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개두릅 홋잎나물을
뜯는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망이 은방망이 놓고간
도깨비 얘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반마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ㅡ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반마(斑馬) - 얼룩무늬가 있는 말.
시인 노천명은 1911년 9월 황해도 장연에서 잘사는 집의 딸로 태어났다. 오빠도 있고 언니도 있고 동생도 있어서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태어날 때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기선'이었는데 여섯 살 때 지독하게 홍역을 앓아서 20일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났다. 성당에 다니던 부모는 그를 살린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고 그 딸의 이름을 '천명'이라고 고쳐 호적에 올렸다. 한국천주교회의 추기경 1순위라고 하던 노기남 주교가 그의 사촌오빠였다.
내가 아는 노천명은 항상 외롭고 쓸쓸하였다. 나는 그의 두 눈을 볼 때마다 순진한 사슴 한 마리의 근심 어린 두 눈을 연상하였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노천명의 '사슴'의 첫 절은 그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한마디이다. 내가 그를 가까이 알게 된 것은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의 가장 가깝던 친구 이정애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김 총장이 그 친구에 대한 추억을 모아 책을 한 권 만들고 싶다면서 시인 노천명과 뒤에 프랑스 공사를 지낸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 최완복, 나를 불러 그 일을 맡기면서다.
우리 세 사람은 가끔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두 사람과 나는 나이 차이가 어지간하였지만 그들의 의견이 서로 충돌될 때에는 젊은 내가 중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로 하여 노천명은 나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책 제목은 '우리 친구 이정애'였는데 출간된 것을 보지 못하고 나는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당시 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환송하는 장소가 소공동의 반도호텔이었다. 시인 노천명은 거기까지 와 저도 나도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서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천명은 내가 귀국하기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미국 유학 중에 나는 노천명의 편지 한 장을 받았다. 그 편지에 적혔던 한마디가 오늘도 그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애절하게 만든다. 그는 6·25가 끝나고 이듬해 '나의 생활백서'라는 수필집을 하나 냈다.
피란 시절 어느 아침 부산의 한 재래시장에 들렀다가 시골 아낙네들이 뜯어온 싱싱한 산나물 보따리를 보면서 '산나물 같은 사람은 없는가'라고 그 책에 한마디 썼다고 한다. 그런데 편지에 나를 가리켜 그가 찾던 '산나물 같은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고 써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편지 한 장을 내가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였겠는가. 그러나 신촌 집을 몇 번씩 뜯어고치면서 내가 집에 없는 동안 그 편지가 들어 있던 허술한 편지 묶음을 영영 잃어 버린 것이다. 누군가가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겠지.
천명은 일찍이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가 가산을 정리한 뒤 서울로 이사 왔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서 소학교를 마쳤고 진명여고를 졸업한 뒤 드디어 이화여전의 문과에 입학하여 영문학 교수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던 월파 김상용에게 시를 배웠다. 여학교 시절부터 그가 선생들과 친구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언어 선택과 구사가 천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당시의 신문사나 잡지사에 글을 썼는데 순수하다 못해 어리석다고 할 만큼 정치에 무관심하던 노천명은 발악하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의 한심한 글을 몇 편 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친일파로 모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그의 생애에는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인민군이 남침했을 때 미처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월북했다 돌아온 임화 등 친북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그들의 궐기대회에도 모습을 나타내 국군이 다시 서울을 탈환했을 때 천명은 구속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광섭, 모윤숙 등이 적극적으로 구명운동을 해 풀려났다. 그는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저질러 일제 말기에는 일본을 두둔하는 글을 썼고 인민군 치하에서는 그들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서울이 수복되고 나서는 부역자로 몰려 한동안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평생 친일파가 되어 본 적도 없고 공산주의자가 되어 본 적도 없고 단지 사나운 표범에게 쫓기는 사슴 한 마리처럼 갈팡질팡하였을 뿐이다.
그런 엄청난 수난을 겪으면서 노천명은 더욱 내성적이 되고 사람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놀란 사슴 같은 맑은 두 눈을 가지고 인생의 가시밭에 번번이 쓰러져 피를 흘린 것뿐이다. 그는 빈혈로 청량리에 있는 위생병원에 입원했으나 입원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고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동료 문인들이 성금을 모아 입원비를 대납하겠다고 했을 때 완강히 거부하였다.
친구 하나가 그의 병실에 찾아왔을 때 그는 원고료를 받기 위해 병원 벽에다가 원고지를 대고 원고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달쯤 뒤에 또다시 쓰러져 백혈병이란 진단을 받았지만,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누하동의 허술한 자기 집에서 혼자 요양하다가 1957년 6월 16일 새벽,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46년의 매우 짧은 삶이었다. 시인이자 평론가이던 잘생긴 김기림의 끈질긴 구애도 물리치고.
그대의 겁에 질린 그 눈빛을 마지막 본지도 어언 60년의 매우 길고 긴 세월이 흘렀건만 그 처절하게 슬픈 눈빛이 이 글을 쓰는 어제도 오늘도 사무치게 그립고야.
김동길 22년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