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1. 17:44ㆍ성지 성당
둘째날
성 김대건 < 안드레아 >신부 제주포착 기념성당
성당의 정면은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은 상해 김가항성당정면 모습이며
지붕은 파도와 라파엘호를 형상화한 것이며 등대모양의 종탑은
어둠의 빛을 비추는 교회와 김대건 신부의 상징이다.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 포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입니다. 부제 때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은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신자 11명과 함께 제물포항을 떠나 상해로 갔습니다. 8월 17일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에 올랐습니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여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한 후 다시 항해를 시작해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라파엘호를 복원하여
해상성지순례를 마치고 9월 19일 용수리 포구를 성지로 선포했습니다.
항해를 마친 라파엘호는 신창 성당 마당으로 옮겨 보존하다가 2006년 11월 김대건 신부 일행의
제주도 표착과 제주도에서 한국인 첫 사제의 첫 미사가 거행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앞 잔디광장으로 옮겼습니다. 2008년 9월에는 기념관 바로 옆에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성당을 건립하여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2017년 10월에는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을 리모델링하고 사제관을 신축해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입었던 상복
조선에서는 상복을 입은 사람이 보이면 위로하는 뜻으로 모두 머리를 숙이고 지나갔다.
조선에 입국하였던 선교사들은 서양인의 외모를 감추기 위해 이러한 상복을 착용하고
교우천이나 은신처로 옮겨 다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페레올 1808 ~ 1853 주교와
다블뤼 1818 ~ 1853 신부 역시 리파엘호를 타고 충청도 강경 부근의 황산포로 입국할 때
이러한 형태의 상복을 입었으리라 여겨진다.
라파엘호
이 배는 1845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일행이 제물포에서 상해로 가고 돌아올 때
탔던 무동력 범선으로 ' 길을 인도하는 대천사 성 라파엘 ' 이라 이름을 붙인 배이다.
상해 금가항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를 비롯한
13명의 일행과 함께 이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 오다가 심한 폭풍을 만나 표류하던
끝에 이곳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였고 , 다시 전라북도 금강 하류 학진포
< 나비바위 >에 도착하여 한국 본토에 상륙하였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기록을 고증으로 하여
이 배를 복원하였고 , 1998년 7월31일 , 김대건 신부 귀국 154년 만에 그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김대건 안드레아는 충청남도 당진 출신. 아버지는 김제준(金濟俊)이다.
증조부 김진후(金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김택현(金澤鉉)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모방 신부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았고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조선에 돌아와 전교 활동과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다가 1846년 새남터에서 25세에 순교했다.
그의 열성적 전교 활동과 경건하고 당당한 신앙자세는 이후 천주교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유네스코는 2019년 11월 14일, 김대건 신부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 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군문효수형을 당한걸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