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3. 23:49ㆍ전시회
천경자 탄생 100주년 전시회에 갔다가 들러 본 천경자화백의 상설전시관입니다.
상설전시관을 들어가서 아무 생각없이 사진을 찍는데 촬영 금지라고 해서
몇 장 밖에 찍지 못하고 관람을 마치고 나왔다. 올리려다 추가로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 올리려고 보니 정말 많은 여인을 그렸다.
쾡한 여인의 눈빛이 화가 자신의 고독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해 본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면 보이는 사진.
발리섬의 무희 . 1986
발리섬의 무희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며 눈동자와 장신구에 금분을 많이 사용하여
색체에 의한 장식성을 강조한다. 천경자의 여성 인물화는 붉은색 , 청색의 입체 화장을
한 것 같은 눈매는 발리 무희들의 화장한 모습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태국의 무희들. 1987
무희들을 소재로 그린 작품으로 무희들은 코끼리와 열대 나무 사이에서 춤을 추고 있다.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1989)
천경자는 1989년과 1993년에 카리브해 연안, 자메이카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왔다. 열대나무와 앤슈리엄, 히비스커스 꽃을 배경으로 표범무늬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천경자 자화상 <알라만다의 그늘Ⅱ>(1985)가 연상된다. 천경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이국 여인의 얼굴과 눈매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초월적인 여인상으로 규정짓고 정형화시켜 표현했다. 보편적인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이목구비를 지나치게 과장한 모습이다.
페루 구스코 시장. 1979
다채로운 색감의 민족적 옷차림과 생활상을 그린 작품이다.
스카프를 쓴 엔지. 연도미상
이국 여인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화려한 원색 무늬 옷과 장신구들이 장식적인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퀭하면서도 야성적인 눈매에
원시적인 이국의 자연속을 배회하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 과 여인상들은
70~80년대 까지 그의 연작 곳곳에 등장한다.
장미와 여인 1981
위작 논란에 휘말렸던 작품 미인도(1977년)
1991년 일어난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창작활동은 파탄을 맞게 된다.
그녀 자신이 그린 적이 없는 그림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절필을 선언하고 잠시 미국으로 요양차 떠나 있었으나, 얼마 뒤 귀국해 다시
붓을 잡기 시작하였고[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첫 번째 회고전(11.1~11.30)을 개최한다.
당시 회고전은 굉장한 화제가 되어서 전시장 매표소에서 시작된 줄이 호암갤러리 밖
서소문 거리에까지 이어졌을 정도였고, 1달 동안 8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으며, 마지막 주말에는
하루 5,000명까지 입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98년 9월 건강이 나빠져
결국 한국 생활을 접고 큰딸이 머물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떠났고, 11월에 일시 귀국하여
그동한 가지고 있던 채색화와 드로잉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모자를 쓴 여인
4월
4월의 신부
6월의 신부.
살아 생전에 꽃을 좋아했다는 화백님은 그림처럼 화관을 쓰고 전시회에
참가하기도 했답니다.
미모사의 향기 / 1977
자살의 미.
하늘에 구름이 너울거리며 날카로운 칼날이 보이는
브랜더 안에 파리한 수선화의 모습이 갈기 길기 찢어져 나가 소멸돼
버릴것 같은 그런 심정을 나타내고자 했을까.
1960년대 후반 가끔 우울증에 빠지고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했다.
우울한 회색 하늘에 탈색된 수선화에서 침울한 화가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여인의 시 1 <1985 >
인간과 자연 , 현실을 벗어나 초현실적인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상한 작품.
여인의 시 2
1984년에 제작된 2점의 연작으로 화백의 자화상입니다.
화백은 고독 속에서의 삶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 작품으로 여인의 누드를 특정모델로
사실적 묘사가 아닌 자유로운 표현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다.
나체여인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근원이 여성임을 뜻하며 벌거벗은채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은
세상의 풍파를 고고하게 살아 온 그녀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화병이 된 마돈나 < 1990 >
1960년대 후반부터 자신이 좋아했던 유명 스타를 소재로 작품에 담아냈다.
천경자는 실제로 배우가 되고 싶어 했고 평생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
백일
여인들 / 1964
면사포를 쓴 여인들의 모습에서 결혼에 대한
환상이 느껴진다. 행복했던 시기였다고한다.
나부 / 1974
느긋하고 홀가분한 자세의 여인은 ?
길례언니 1
길례언니 2 / 1982
고흐와 여인
윤사월 1987
4월 / 1974
자바의무희1986
아라만다의 그늘 1985
황금의 비 /1982 . 화백의 며느리 유인숙 화가가 모델이었다고한다.
이 그림은 황금비가 꽃비처럼 쏟아지는 봄날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우수어 젖은 이국적 여인의 눈빛과 긴 목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하염없는
그리움과 가슴깊이 묻어 두었던 여인의 추억을 회상하게 한다.
누가울어 1 / 1988
누가울어 2 / 1989
화백의 아픈 개인사까지 투영돼 있는 서사적 자화상인 작품이며,
무려 여덟달를 거쳐 완성한 작품이라고도 한다.
이 작품은 모친을 여이고 남편과 사별한 후 슬픔을 잊기위해 그렸단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이별해야하는 아픔을 주체하지 못해 엉엉 울어야했던
작가의 절박함을 누드라는 역설적인 이미지로 묘사했다.
탱고가 흐르는 황혼 1978년
그림 작업 틈틈이 담배를 피웠던 것으로 알려진 천경자 화백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내가 밥는 먹는 줄 아세요, 내 끼는 커피와 담배뿐이요. 그래서 이렇게 기운 있지." 라고
말한바 있단다. 또한 화백은 " 나를 달래준 것은 오로지 한편의 슬픈 영화요, 한개비의 담배였다"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담배는 기호식품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인
수녀 데레사
여인 / 1982
아그라의 무희 / 1979
캬바레 < 뉴욕 >1990
우수의 티나 1993
황혼. 199
꽃과여인 < 미인도 >
황혼의 통곡 1995
막을 내리고
이 작품은 천경자의 여행 풍물화 중 하나로 , 작가가 한평생 몰두했던 주제인 '여인상'을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제목을 보아 그려진 두 명의 여인은 하와이 무용수들이고
공연을 막 끝낸 직후인것 같다.
모자를 파는 그라나다 여인
미인 / 1987
화려한 색감을 통해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중에는
실존하는 인물을 그렸음에도
작가의 내면 세계를 거쳐 다시 태어난 그림속 자신의 분신을 볼수있다..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생애 마지막 개인 회고전을 열자 8만 관객이 모였는데
1998년 11월에는 그가 아끼던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전격 기증하면서
미술계를 놀라게 했던 게
뉴욕으로 사라지기 전 그가
이땅에 남긴 마지막 발자취였다.
조부 / 1943 첫 작품이라고 한다.
1942년 , 1943년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에 입선된 데뷔작이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모습에서 , 강직하지만 손녀에게 한없이
너그러웠을 것 같은 모습이다.
노부 / 1943
환상여행
"영의 세계를 형상화한 대작을 그리고 싶은데 시간이 없을것 같다." 라고 말한.
결국 미완으로 끝나버린 안타까운 그림이다.
여인들이 웅크리고 누워있는 모습에서 말년 화가의 고독한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어머니 천경자의 작품은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변화와 도전의 시대를 열게 됩니다.
특히 1977년에 들어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테레사 수녀’ 등 불후의 명작을 창작하여
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1977년 동양화 재료로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화면의
두터운 질감과 거친 실험적 표현에 도전하여 경이로운 성취를 이루셨습니다. - 화백의 딸 -
화가의 일생은 초기, 중기, 만기의 3기로 쪼개어 볼 수 있다.
초기는 보인 그대로 자연을 묘사하게 되고 , 중기에 비로서 느낌을 표현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 꿈과 상상의 우물을 파
그것을 표현하는 완숙기에 들어갔다가 죽는다고나 할까?
물감을 으깨고 붓을 놀리고 하는 것이 나의 일상 생활이니 노상 꿈을 파먹고 산다고 할만도 하다.
웬일인지 해가 갈 수록 성미가 더 꼼꼼해져 한 작품을 완송하기까지는 무던히도 맴돌고 헤매여야한다.
나의 타고나지 못한 비천재의 탓을 한탄도 해보지만 그러나 나일론 깔깔이 같이
기계에서쉽게 다량으로 쏟아져 나온 것보다는 누에가 뽕을 먹고 자라 실오라기를 뿜어내어
누에고치가 되어 명주나 비단이 짜여져 나오는 식으로 모체의 태반
냄새가 나는 것이라야 한다고 나는 늘 자위해 보는 것이다. 나는 글 쓰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그림 그리기를 더욱 사랑한다.
글 없는 나는 있을 수 있어도 그림 없는 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84년 4월 천경자
-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 중에서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자피 부는 바람이다. 어디서 일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들, 그 위에 인생이 떠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믿는 신은 한 인간이 어느 만큼이나 열렬하게 자기 삶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존재하기도 하고 , 그 운명의 문은 열리리라고 믿는다.
담배를 피워 물고 긴 한숨을 내려 쉬며 거울에다 연기로 < 자유 > 라고 쓴다.
< 내 슬픈 전설 >이라는 말이 왠지 좋았고 나이 만49세 때 아마튜어가 아코디언을 켜듯
쓰기 시작한 글이어서 49페이지라 덧붙여 책이름을 지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 내 생애는 몇 페이지의 여백이 남아있는 것일까.
1979년
- 자유로운 여자 - 중에서
나는 지금 나의 인생 전부의 어느 선에 서 있는지 모르나 지나간 날을 생각해보니
별로 후회할 일도 없이 무던히 살아 왔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나의 과거를 열심히 살게 해준 원동력은 < 꿈 >과 < 사랑 >과 < 모정 >이라는
세가지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꿈은 그림과 함께 호흡해 왔고 , 꿈이 아닌 현실로서도 늘 내 마음 속에 서식해 왔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 준 것이 사랑과 모정이었다.
< 영원히 미완성이 될지 모를 꿈을 향해 > 쓰라린 고배와 불운을 감수해야 하기도 했었다.
나는 이 화문집에 쓰라린 고배와 불운을 감수해 오고 또 감수해 갈 나의 꿈과 사랑과
모정을 담아 본 것이라 하겠다.
1980년 3월
< 꿈과 바람의 세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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