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8. 17:30ㆍ역사 탐방
역사 탐방에서 지난 번 경복궁 후원 쪽을 둘러보지 못해서 이번에는 그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고종 때는 7,200칸에 달할 정도로 빼곡히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는데,일제 침략기를 거치면서 10%만 남아버렸다.
그 때 없어지지 않았다면 엉청 큰 궁의 모습이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후원은 아미산 담장 뒷편 북쪽으로 있는데 주로 후궁들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경복궁을 가면 근정전 , 경회루, 강년전, 교태전 정도만 보고 돌아 와서 후원 쪽으로
그렇게 넓게 후궁들의 거처가 있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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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경복궁의 후원은 1395년 창건된 이후 태종 대에 들어 조성된다.특히 후원에는 넓은 평지가 있어
휴식 공간을 넘어 군사 훈련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고종 연간 중건될 때 이곳은 융문당, 융무당, 경무대 등 200간이 넘는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후원의 전각들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총독부 관저가 들어섰다.
당시 후원 전각들의 자재는 일본 절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경복궁 뒤편의 태원전에서 나와 좀 더 북쪽으로 걸으면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이 나온다.
사방신(四方神) 중 북쪽을 지키는 신은 현무(玄武)다. 그래서 신무문의 아치 천장에는
용맹한 현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신무문은 태조 때 만들어졌지만 구체적 이름은 없이 북쪽의 성문, 북성문(北城門)이라 불렀다.
그러다 성종 대에 들어 그 이름이 신무문으로 정해졌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탄 신무문은 270여 년 후인 1867년
고종 연간 중건되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이 문으로 나가면 바로 청아대로 건너 갈 수 있다.
신무문이 우리에게 익숙해진 것은 2000년대 들어서부터이다. 이곳은 청와대 앞이라는
이유로 일반인의 접근을 철저히 금지해왔다. 그러던 것을 2006년 개방하여 누구든 신무문을 통해
청와대를 볼 수 있게 되었고, 현재는 청와대를 개방하여 국민 누구나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內殿)은 궁중 여성들이 생활하는 공간의 중심이었다. 경복궁에서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은 강녕전 안쪽에 있던 교태전이며,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불탄 이후에 정궁으로 이용되었던
창덕궁의 내전은 대조전이었다.후궁과 궁녀들의 생활공간은 따로 지어지거나 일정한 건물에 지내는 것이 아니라
내전 주변에 위치한 별도의 독립 건물에서 거처하였다. 후궁이 되었을 때 그들이 거처하게 될 건물을 지정하며,
그에 따른 당호(堂號)가 내려지고 독립생활을 하게 된다. 무슨 무슨 당(堂) 김씨와 같이 호칭하는데,
숙종 때 장희빈의 경우 취선당(就善堂)이란 당호를 썼으며, 고종은 그 후궁들에게 광화당, 영보당,
보현당 등 당호를 하사하였다. 이 당호를 하사한다는 의미는 첩지를 주는 것 만큼이나 후궁으로서 인정 받았다는 뜻이었다.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순화궁)의 경우는 왕의 특별한 총애로, 헌종이 500간 이상의 낙선재를 새로 지어주었다.
그러나 후궁은 왕이 승하하고 다음 대의 왕이 즉위하면 본궁을 나와 자기 몫의 사궁으로 나가야 했다.
또 왕이 아직 생존 중이라도 후궁이 늙고 병들면 본궁을 나와야 되는 것이 궁중예법이었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도 본궁에서 나와 궁정동에 있는 (현재의 칠궁 자리)로 돌아왔다.
순화궁도 안국동과 인사동 사이에 있는 거처로 나왔다. 조선시대에는 후궁으로 있다가 자식도 낳지 못하고 과부가
되면 수절을 하고 죽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정업원(定業院)의 스님이 되었다. / 네이버지식백과
잔디의 넓은 터는 궁이 있었던 자리이다.
특히 1860년대 경복궁을 중건한 고종은 청와대 권역을 창덕궁 후원과 유사한 기능을 갖춘 곳으로 조성하고자 했는데
융문당과 융무당 같은 건물을 세우고, 과거와 무술 시험을 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68년 경복궁이 완공된 후 창덕궁에서 이어(移御)한 고종은 창덕궁 후원처럼 경복궁 북쪽에 궁장을 이어 쌓고
경복궁 후원을 만든다. 고종 때 만든 경복궁 후원이 바로 지금의 청와대 지역인 것이다.
흥복전
일제강점기에 헐려 일본식 정원이 들어서기도 하였으며, 경복궁복원 2차계획사업 진행으로,
2020년 개방하였다. 효명세자의 부인이자 고종의 양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머물다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후궁 권역에 있어 후궁들의 처소였다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2007년 함화당 수리 도중
상량문을 발견하여 정확한 용도를 확인했다. 고종의 침전으로 지은 것이다.
함화당 · 집경당 일대는 당시 고종이 머물던 건청궁과 가까웠다. 왕의 침전을 후궁 영역에
굳이 지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함화당과 집경당을 후궁 권역보다는 건청궁과 하나로
묶이는 공간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고종은 함화당을 신하들을 만나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1892년(고종 29년)부터는
외국 공사 접견소로도 활용했다.
함화당과 집경당
경복궁 교태전을 나서면 향원정과 건청궁을 가는 길에 독립된 영역처럼 보이는 건물군인 함화당과 집경당을 볼 수 있다.
건물 형태는 일반 사대부 저택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주위에는 후궁들이 거처하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
그 용도는 알려져 있지 않고 , 후궁들이 거처하기에는 그 규묘가 크다.
청아대 쪽으로 나가는 신무문.
문화재청이 빈궁과 후궁의 처소로 사용됐던 경복궁 영훈당 복원사업에 본격 착수한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13일 2027년까지 165억 원을 투입해 영훈당 등 건물 7개동, 우물·담장 등
주변 시설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향기가 영원히 이어진다는 뜻의 영훈당(永薰堂)은 고종 때 역시 후궁 처소인 흥복전과 함께 지어졌으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일제에 의해 소실됐다.
<함화당과 집경당>
경복궁 교태전을 나서면 향원정과 건청궁을 가는 길에 독립된 영역처럼 보이는 건물군인 함화당과 집경당을 볼 수 있다. 건물 형태는 일반 사대부 저택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주위에는 후궁들이 거처하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그 용도가 알려져 있지 않고, 후궁들이 거처하기에는 규모가 크다.
식수로 먹던 우물.
우물이며 빨래터였다
경복궁엔 항상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다닌다.
명성황후 시신이 불태워진 곳이기도 하다.
침류각은 팔작지붕을 갖춘 1900년대 초기 건물이다. 주변에 메타세쿼이아 세 그루와 낙우송 일곱 그루가 모여 있다.
하나같이 20m가 넘는 높이로 수려한 풍광을 자아낸다.
담장 너머 민속박물관이 보인다.
건청궁 내 장안당은 고종이 기거하던 사랑채겸 침실. 뜰에 고종이 즐기던 고종 감나무가 있다.
문을 들어서면 장안당의 모습이 드러난다
곤녕합
곤녕합(坤寧閤)은 명성황후의 침전으로 민가의 안채에 해당된다. 곤녕합 내부에는 문화재청이 의뢰해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궁중유물기준에 따라 복원한 자개침대 등 궁중생활용품 3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장안당과는 복도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곤녕(坤寧)은 '땅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왕비의 덕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금성의 곤녕궁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곤녕합의 남쪽 누각인 옥호루(玉壺樓)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옥호루의 명칭은 옥호루(玉壺樓)가 아닌 옥곤루(玉壼樓)라는 주장도 있다.
건청궁
건청궁(乾淸宮)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궁궐이다. 1873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는데, 이 미술관은 해방 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됐다. 2007년 10월 18일 일제가 철거한 건청궁이 복원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건청궁 복원공사는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5단계 사업인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04년 6월에 시작돼 3년 4개월 만에 완공됐다.
명성황후가 일본군에게 시해된곳이다.
팔우정은 궁중 다과와 책을 파는 북카페로 활용되고 협길당은 열람실로 개방. 북카페의 운영 주체는 한국문화재재단이다.
경복궁 내 집옥재(集玉齋) 옆에 있는 정자이다. 경복궁의 최북단이자 건청궁 서쪽에
고종의 서재로 쓰였던 집옥재가 있다.
1876년(고종 13) 경복궁의 대화재로 내전이 소실된 후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1881년 고종이 창덕궁에 있을 때 함녕전(咸寧殿) 북별당(北別堂)으로 집옥재를 지어 서재로 사용하였다.
경복궁 재건 후 고종이 경복궁으로 환어한 후 1891년 창덕궁에 있던 집옥재를 경복궁의
보현당 뒤쪽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이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에서 고종은 신하들을 접견하기도 하였으며, 도서관처럼 이용하기도 하였고,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기도 하였다. 실제 『고종실록』에 보면 이곳 건물들에서 각국 공사를 접견하였으며,
일본공사, 미국공사, 오스트리아 사신 등을 접견하였다. 또한, 이 건물들에 어진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이 건물들은 당시 신식의 건물들로서 신문화 유입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였다. 근래에 집옥재를 작은도서관으로
개방하고 팔우정을 북카페로 운영하여 일반인들에게 궁궐을 개방하고 각종
인문학 강좌를 열어 옛 전통문화를 느끼게 하고 있다.
고종의 쉼터로 사용되었던 정자 팔우정은 현재 북카페로 운영 중이다.
집옥재 오픈시간에 맞춰 전통 다과와 차, 그리고 커피 등을 판다. (참고로 고종은 커피 마니아였다) 위엄있고
여유롭지만 어딘가 모르게 숙연함을 느끼게 되는 건, 아마 계속되는 불운과 일본의 횡포 등에 힘없이 망국을
지켜봤던 고종황제의 고민과 설움이 느껴져서인 듯 하다.
협길당(協吉堂)
고종이 휴식을 취하며 머물던 곳.
경복궁 건청궁 서쪽에 위치한 전각으로 집옥재와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건물의 명칭인
'협길(協吉)'은 '함께 복을 누린다'라는 뜻으로 현판의 글씨는 중국 명나라의 서예가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건물 내에 온돌방이 있어 고종의 집무실 또는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향원정과 취향교】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인공의 섬을 만들어 2층의 육모지붕을 얹은 정자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 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가는 섬에는
나무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라 하였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 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향원정은 지난 2018년에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3여년 간의 공사 끝에 2021년 11월에
본래 모습을 되찾았으며 향원정 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 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으며 보물 1761호로 지정되었다.
취향교는 건청궁과 향원정 사이에는 연못을 가로 지르는 다리이며 ,
이전에는 석교 교각에 목재 난간을 갖춘 평교 형태였으나 이번에 아치형 목교로
제 모습을 찿았다고한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외국인 가족들의 모습이 한국의 의상을 체험하는 아름다운 시간이었기를 바란다.
경복궁 후원 기초조사연구는 그간 접근이 불가하였던 청와대 권역이 개방됨에 따라
역사, 건축, 고고, 조경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함께 논의하면서 그간 미흡하였던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학술적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궁중에서 봉직하는 품계(品階)가 있는 여관(女官)으로,
▶ 빈(嬪, 정1품), 귀인(貴人, 종1품),
▶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 소원(昭媛, 정4품), 숙원(淑媛, 종4품) 등은 직무가 없고,
▶ 상궁(尙宮, 정5품) ~ 진섭궁(秦燮宮, 종9품)까지의 궁녀는 직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