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21. 22:39ㆍ전시회
돈덕전은
덕수궁의 건물.석조전의 뒤에 있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었다.
돈덕전을 지은 이유는 1902(광무 6년) 10월에 있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 때문이었다.
근대화를 주도해 큰 성과를 고종은 이 예식을 통해 근대국가
대한제국의 위용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계획했다.
바로 그 행사의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돈덕전을 지은 것이다.
광복80주년을 맞이하여 돈덕전에서도 항일운동을 했던
애국자들의 자료들이 전시중이었다.





회화 나무의 하얀꽃이 광복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햐얗게 피었나 보다.

전시는 개항기부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광복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항일유산이
담고 있는역사를 총 5부로 나눠 소개한다. '자주구국의 유산', '민중함성의 유산',
'민족수호의 유산','조국광복의 유산', '환국의 유산' 등이다.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미디어아트로 전시 내용을 소개하는 무거운 내용이지만
미디어 아트의 화려함과 영롱함이 과거의 슬픈 역사를 잠시 잊게 한다.













주요 전시품으로는 지난해 7월 일본에서 환수한 '한말 의병 관련 문서',
지난 4월 개인 소장자가 경매를 통해 환수해 온 안중근 의사의 유묵 '녹죽'(綠竹),
대한제국 주미공사 이범진의 외교일기 '미사일록'(국가등록문화유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연맹에 제출한 역사서 '한일관계사료집' 등이 처음 공개된다.

대한제국 외교 기록물 '미사일록'










서울 진관사 태극기 / 보물 2142호
1919년 3.1운동 당시 제작되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로, 2009년 진관사의
칠성각 해체 복원 과정에서 발견되어 '진관사 태극기'라 이름 붙여졌다.
일장기 위에 태극기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하여 항일 의식을 극대화 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진관사 태극기 발견 당시 ' 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해 각종 독립운동
관련 문서 등이 함께 발견됨으로서 진관사가 독립운동에 비밀 거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진관사에 머물던 백초월 스님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진관사 태극기


3·1운동 당시 생산되었던 태극기 목판. 일장기 위에 태극 문양을 덧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직접 태극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한국광복군군복
광복의 염원으로, 하나 된 독립군
1940년 9월17일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드디어 독립군 통합의 결실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가 직접 조직한 최초의 정규 무장부대로 ,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후 화북의 조선의용대 일부가 합류하고 ,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까지
참여하면서 광복을 위한 통일된 전선이 형성되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통합의 상징으로 자리잡으며 ,무장투쟁의 중추적 기반으로 성장해갔습니다.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이 태극기에 적힌 "피 흘림 없는 독립은 값없는 독립" "우리는 조국을 위하야 피를 흘리자" 등의
글귀와 함께, 고윤병·김만준·윤병천 등 '무명(無名)'의 독립운동가들의 서명을 마주하면
광복의 무게가 더욱 깊이 다가온다.







도산 안창호의 일기.







말모이 원본

보물 2086 / 조선말큰사전원고















안중근 의사의 손자국으로 잘 알려진 '유묵'의 모습.
이번 전시에서 114년 만에 처음 공개되었다고 한다.
녹죽
푸른 대나무를 뜻하며, 절개와 기개를 상징한다.오언시집 추구에 나오는 구절로 ,
안중근 의사의 지조와 신념을 표현한 것으로 평가 된다. 1910년 사형을 앞두고 남긴 유목으로
일본의 한 소장자가 보관하던 것을 2023년 경매를 통해 국내로 환수, 광복 80주년을 맞아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특별전 ' 빛을 담은 항일유산 '에서 처음 공개되었다.힘 있고, 기개 넘치는
필체로 ,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한국광복군선언문
1940년 9월15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을
알리며 발표한 문서이다. 이 선언문은 단순한 창군 통보가 아니라 무장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을 천명한 역사적 선언이다.
발표자는 김구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겸 광복군 창설위원회 위원장 > 선생이다.





망명생활 속에서도 틈틈히 기록한 도산 안창호의 일기와 가족사진 ,
그리고 양우조최선화 부부의 딸 제시
육아 일기 속에 담긴 외국생활의 불안감과 고단함,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들.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지기 3일 전 찍은
기념 사진과 윤봉길 의사가 어머니에게 쓴 친필 편지.

김구가 1929년 중국 상하이와 1942년 충정에서 집필한 자서전.
독립을 위해 몸 바쳐 애국하신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마음에 새기며 지금의 대한미국을
더 훌륭하고 살기 좋은 나라로 이끌어 가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가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늘은 높고 흰구름은 떠 다니고 바람은 아침 저녁으로
기분좋게 살랑거리며 불고 있다. 무더웠던 여름은 영원할 것 같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물러가지 않더니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나보다.



석어당
석어당은 즉조당과 함께 덕수궁 모태가 되는 건물로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석어'는 ' 옛날에 임어 < 왕이 왕림 >하다라는 뜻으로 , 임진왜란때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이다. 광해군 대에는 선조의 왕비 인목대비가 유폐되기도 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후 광해군을 문책한 곳으로 알려졌다. 인조는 경운궁의 전각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석어당과 즉조당은 보존하였다. 석어당은 덕수궁에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2층 건물아자 단청하지 않은 건물이다.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의주까지 피난갔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와 임시로 정치를 행하였던 곳으로,
1904년의 화재로 원래 건물은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90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덕수궁엘 오면 단청없는 석어당의 수수하고 오랜 정이 쌓여 있는 듯한 모습이 늘 신선하게
다가오곤 했다. 오늘은 목을 길게 빼고 안을 아주 천천히 바라 보았다


석어당은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도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2층 내부 .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




종도리
한옥 지붕구조에서 들보에 직각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둘러 얹혀서 연직하중
또는 수평하중을 받는 가로재 중 하나.
마루도리라고도 부르며 가구재의 최상부 부재로서 용마루 받침재이다.

1층에 있는 편액
편액을 보면 '석(昔)'자 옆엔 '어필(御筆), 당(堂) 자 옆엔
광무구년을사칠월 일(光武九年乙巳七月 日) 이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을사년 7월 어느 날에 고종이 썼다는 뜻입니다.
다음엔 석조전 내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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