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2013. 7. 2. 15:10전시회

 

 

 

 

 

 

고갱을 모델로 쓰여졌다는 써머셋 모옴의 소설 " 달과 6펜스 "를  읽었던 것이  거의 40년전이 훌쩍 넘겨 읽은 책이다.

그래서 고갱을 이해하고 그의 전원적이고 원시적이었던 타이티섬의 작품들을 좋아 했었다.

일요일 이라 전시장은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토슨스 시간에 마추었어야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텐데..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19세기 폴 고갱의 작품과 21세기 현대미술작품이 만나는 이색적인 전시를 마련하였다.

 

폴 고갱은 대표적인 후기인상주의 화가로 상징주의, 종합주의 등의 탈인상주의 화풍을 탄생시키며

스스로 인상주의의 종말을 고하였던 급진적인 예술가였다.

모더니티(근대성)의 포문을 열었던 그의 화풍은 야수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주의 등 20세기 미술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21세기 오늘날의 시각예술에도 폴 고갱이 남긴 상징주의적, 종합주의적 태도는 지속되고 있다.

본 전시를 통하여 서울시립미술관은 고갱 작품과 그 이후 현대미술작품을 접목시키며 ‘고갱 재해석’을 시도했다.

고갱의 독특한 미술사적 양식을 재조명함과 동시에 그의 작품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성에 전시의 초점을 두며

21세기 현대미술작품과 어우러지게 구성하였다.

고갱 예술의 특징을 양분하는 브르타뉴(Bretagne)와 폴리네시아(Polynesia)시기는

'설교 후의 환상' '황색 그리스도'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무엇인가, 어디로 가는가'등 고갱의 3대 걸작을 통하여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마르코 브람빌라를 비롯한 6인의 현대미술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을 통하여

예술적 언어와 추구하는 정신이 고갱의 상징성과 급진성 이라는 유전인자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미술작품의 시각적인 개입이 고갱이 추구하던 ‘낙원’의 의미를 다채롭게 해석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고갱은 오랜 방랑과 고된 삶으로 인해서 작품을 그리 많이 남기지 못했고,

그나마 있는 작품들 조차 세계 도처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 전시는 고갱 3대 걸작과 함께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타히티의 여인들' '파아 이헤이헤 타히티 목가'등 60여점의 진귀한 고갱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인터넷에서 )

 

 

세계 (  파리 오르세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워싱턴 굴립미술관 ,일본 등)

각지에 있는 그림들을 모아 전시 되었으며  미술품의 보험금이 1조 5천억이 넘는다고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1897 )

위의 그림은 고갱이 타이티 섬에 있을 때 그린 대작 (  가로 140  세로 91.5cm ) 으로 친구에게 죽음을 암시하는  편지를 보내고 작품이 완성 되었을때

자살을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황색 그리스도  (1889 )

 

        설교후의 환상  -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   (1888 )

 

소녀의 초상

 

          기원

 

   타이티의 여인들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알래스컹의 풍경   (  1888 )

   이아 오라나 마리아   - 마리아를 숭배한다 -            ( 1891 )

 

    신의 날      ( 1894 )      

 


외젠 앙리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년 6월 7~ 1903년5월 8일프랑스인상주의 화가이다. 파리에서 태어났다.

고갱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아버지는 자유주의자로서 망명하여 남미 리마로 가던 도중에 죽고, 그 후 고갱은 7세 때에 프랑스에 돌아온다. 바다를 동경하여 선원이 되어 남미도 항해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그만두고 화가로서 새출발을 한다.

퐁 타벵

그러나 회화는 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돈은 다 떨어져서 아내의 고향인 덴마크로 가는데 덴마크에서 발표한 일도 실패, 고갱은 처자를 남겨두고 단 하나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파리에 나타났다. 그러나 생활은 궁핍하여 포스터를 붙이는 노동도 했다. 그리고 1886년부터 브르타뉴의 퐁 타뱅으로 가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인상파의 그림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창시, 평면적인 채색으로 장식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화풍을 따르는 젊은 화가들과 '퐁 타벵(Pont-Aven) 파'를 창립하였다. 파리로 돌아가서는 고흐를 만났다.

순수함을 찾다

그러나 고갱에게는 순수함에 대한 정열이 있었다. 문명의 거짓을 좋아하지 않았다. 거짓이 없는 순수함 속에는 이 있다. 거기에는 시(詩)가 살아 있다. 고갱은 1887년봄에 남미로 건너가고, 다시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지만 병으로 인한 고뇌로 귀국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퐁 타뱅으로 다시 가 거기에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새로운 회화의 론을 주장한다. 이어 고흐의 초대로 아를르에도 가지만 그 우정은 깨져 버려, 재차 순수함을 그리워한다. 그 염원을 달성한 것은 1891년으로, 고갱은 태평양타히티 섬 민중들의 순수한 삶과 개성에 감동하여 수많은 작품을 그려 낸다. 고갱은 한번 파리에 돌아오지만, 1895년에는 타히티에 돌아간다. 그러나 그림 제작하는 것 외에는 궁핍과 병과 싸우는 생활이고, 1901년에는 도미니카 섬으로 옮겨 가서 고독한 생애를 마친다.

그림의 개성

그는 세잔·고흐 등과 함께 후기 인상파의 한 사람인데, 세잔은 객관적 또는 공간적인 것을, 고흐는 주관적인 것을 제재로 하였으나, 고갱은 장식적인 것의 부활을 주로 하였다. 그의 강렬하고도 새로운 장식풍의 그림은 후세 그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움 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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