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2024. 6. 28. 13:10역사 탐방

 

옥사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오니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외국에 나가면 그렇게 반가웠던, 평상시에 덤덤했던 애국심이 발동을 한다.

잠깐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을 했던 순국선열들을 생각해본다.

숙연해지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묵념을 보내본다.

 

 

 

 

한센병사는 다른 사람에게 옮길까봐 동떨어져 있다.

 

 

   

사형장  : 

공작사 북서에 있는 한센병사와 9옥사 사이를 지나면 오른편에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형무소 확장 이후 지어진 사형을 집행했던 곳이다.

   

지상1층과 지하1층의 일본식 목조건물로 1922년 전 후에 이전된것으로 추정된다.

사형장은 5m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형무소 안에서도

보이지 않게 차단되어 있다.1층 안에는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마루판과

교수형에 쓰이는 줄, 가림막 뒷쪽에 마루판을 밑으로 내리는 장치가 있다.

마루판 아래 지하실은 시신을 수습하던 공간이다.

최초로 건립된 1908년부터 해방 전까지 확인한

사형집행인원은 493명. 이중 정부로 독립운동을 인정받은 자는 무려 92명이었다.

공인받지 않은 인원까지 합쳐도 무려 27%에 해당한다고 한다. 

 

 

 

 

사형장을 보면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 있는데, 형장으로 가는 독립투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어 나무를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통곡의 미루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무마저도 3년 전

태풍으로 줄기가 뽑힌 채로 누워 있다. 
 

 

시구문 

일제강점기에 사형 집행후 시신을 바깥의 공동묘지로 내보내기 위해

밖으로 연결한 통로이다. 붕괴되었던 것을 1992년 에 독립공원을 만들때 발굴하여 

40m를 복원하였는데 원래 길이는 200m라고 전해진다, 일제는 시신에 구타나

고문의 흔적이 많은 경우 , 사형사실이 알려져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우려가 되는 경우 ,

시신을 받아갈 유적이 없는 경우에 이 문을 통해 시신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옥사 뒤에는 재소자들이 노역을 했던 공작사가 있다. 관공서와 군부대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했다고 하는데, 옷감, 의복, 벽돌들을 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고 나서는 전쟁물자를 생산했는데, 재소자에 대한 구타와 인권유린이 끊이지 않았다.

 

 

여옥사 

여성 미결수를 가뒀던 구치감으로1916년  즈음 지어졌다가 1978년에 철폐되었던

것을 2011년에 복원했다.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갇혀 고난을 겪었다.

여옥사 감방은 1920년 3월 1일에는 3.1운동 1주년 옥중 만세투쟁이 펼쳐졌던 현장이다.

 

 

 

 

 

 

 

 

                 

격벽장

수감자들이 햇볕을 쬐거나 간단한 운동을 했던 곳으로 운동할 때 대화하거나

도주하는 것을 막기위해 격벽을 세워 수감자들을 분리하고 감시했다.


밖으로 나오는 길에 기념품 가게도 있다.  이것으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기행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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