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30. 16:11ㆍ역사 탐방
6월 15일
인원 ;33명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유교건축
종묘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한 종묘는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 그리고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죽고 나서 왕의 칭호를 올려받은 왕과 그 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행하던
왕실의 사당이다.
종묘는 인류의 문화 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거하여 유네스코에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 유산이란 당해 문화재가
세계적으로 특출하고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보호되어야 할 유산을 말한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유교적 전통 신전으로
1395년(조선 태조 4년)에 지어졌으며,
그 후 매년 이곳에서
종묘 제례 의식을 올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종묘 들어기가전 종묘공원 안에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이 종묘를 드나들 때 물을 마셨다는
우물이 다시 만들어졌고,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동상과 편의시설을
갖춘 녹지대가 만들어져 있다.
종묘 앞 일대 39,669m²(1만 2천여 평)의 마당에 주차시설을 갖춘 종묘광장공원은
서울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운영으로 개화구국의 지도자 역할을 한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도 볼 수 있습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직후 태조(이성계)는 자신의 4대조에게 차례로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추존 4대왕),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경(개성)에 효사관(孝思觀)을 세워 그곳에 추존 4대왕의 신주를 모셨었는데,
1394년 조선의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이듬해인 1395년 한양에 종묘를 세우면서
추존 4대왕의 신주를 종묘로 옮겨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외대문(外大門) : 종묘의 정문.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함. 정문 밖에는
하마비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이 있음.
종묘전교
'종묘로 들어가는 입구의 하천인 회동 재생동천에 축조된 다리로 대동지지에서
이다리를 "종묘전교 라 하였다
종묘전교는 처음에 나무다리었던 것을 세종 3년(1421) 돌다리로 개축 하였고
이후 현종 4년(1663)에 개수(改修)한 바 있었다.
역대 -왕들이 종묘에서 행하는 종묘대제를 비롯한 각종 주요행사때에
이용하였던 중요한 다리였다.
이 다리는 널다리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폭 9.6m, 길이 6.9m)규모인데,
다리의 바닥 한가운데가 좌우보다 한단 높은 어도 형식이고 다리가 설치된
가장자리 네 모서리에는 해태 상을 새긴 화표주(華表柱)가 마련되어 있다.'
모두를 말에서 내리게 만드는 하마비(下馬碑)와 왕의 우물인 어정(御井)을 지난다.
외대문(外大門)이 맞는다. 종묘의 정문이다. 홍살로는 왕들의 영혼이 지나간다.
바람이 지나는 길이 곧 영혼들의 행로다. 단청은 화려하지 않으며 외대문의
전체 형상도 지극히 검소하다. 제례의 공간을 대변한다.
이제부터 이어지는 모든 풍경들이 그러하리라. 외대문은 조선시대에는
3단의 계단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계단 높이와 평행한 도로가 났고 계단은 소실됐다.
망묘루(望廟樓)
왕이 제향시 이곳에 들러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을 가진 건물. 평소에는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1443년 세종 때 망묘루 옆에 사각형의 연못이 조성되었고 가운데 둥근 섬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는 옛 사상에 따른 것입니다.
대부분의 궁궐 연못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여기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모신 신당. 망묘루 동쪽에 있다.
하나의 종이에 두 위의 초상화를 같이 그려 놓았다. 태조 이성계가
처음 종묘를 세울 때 명령을 내려 같이 세웠다고 한다. 신당 내부 왼쪽에는 공민왕이
그린 준마도(駿馬圖) 세 점도 같이 있다.
향대청(香大廳)
종묘제례에 사용하는 향, 축, 폐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 원래는 정전, 영녕전,
공신당 각각의 향청이 따로 있었는데, 현재는 정전의 향청만 남아 있음.
재궁(齋宮) : 임금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 정전 동남쪽에 위치. 어숙실(御肅室)이라고도 함.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御齋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왕이 목욕하던 어목욕청이 있음.
어숙실(御肅室)
왕이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
정전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북쪽에 어재실, 동쪽에 왕세자 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다.
방화수를 담아 두는 그릇 .
왕과 세자가 머물었던 곳.
모든 문화재는 임금이 있는 공간을 북쪽으로 지정하는 상대향에 맞춰 비치되어 있습니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은 그 의미에 맞게 세자의 동궁. 서쪽에는 제사 전 몸과 마음을
깨끗히 할 수 있는 어목욕청이 있다.
윗쪽 여기 자리는 세삿상에 놓일 음식을 올려 놓았던 자리이다.
이곳을 올라서서 정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혼백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옆에 작은 자리는 세자의 자리였다고 한다. < 우리 선생님 >
동문: 임금이 드나 들렀던 문이다.
아침 나절 날씨가 좋았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동문인데 귀신도 문이 다 닫혀 있으면 답답하다고 문을 엇갈리게 만들어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도록 틈을 두었다고 한다.
전사청(典祀廳)
정전의 동북쪽에 자리하며 종묘의 제사에 사용되는 제례음식을 준비하던 곳.
부엌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주(神廚)라고도 부른다. 마당을 중심으로 주위에 ㅁ자형 건물을 배치했다.
마당에는 제수를 준비하던 돌절구 등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정전에 올릴 제수음식을
미리 검사하던 찬막단이 있다.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 행각에는 온돌과 마루방이 있다.
제정(祭井)
제례 때 사용하는 명수(明水)와 전사청에서 제수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물을 긷던 우물.
전사청 동쪽에 자리하며, 네 면을 담장으로 두르고 남쪽에 팔작지붕으로 된 일각문이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이 차갑다고 한다. 들여다 보니 지금은 다 말라 있었다.
종묘제례
조선시대에는 종묘제례를 정전에서는
매년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섣달 그믐에 다섯 차례 지냈으며,
영녕전에서는 봄과 가을에
두 차례 지냈다.
현재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낮에 정전과 영녕전에서
각각 한 차례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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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입니다.
1396년(태조 4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 때 다시 지은 후,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불렀고, 영녕전은 종묘와 구별되는 별묘였습니다.
정전(正殿)
대한민국의 국보 제227호이다. 종묘의 중심건물로서 좁은 의미로는 이 건물이 곧 종묘이다.
태조를 비롯하여 임금의 신주 19위, 왕후의 신주 30위 총 49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의 남쪽 중앙에는 혼과 향로를 모시는 신문(神門)이,
동쪽에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東門)이,
서쪽에는 악공, 일무원, 종사원 등이 출입하는 서문(西門)이 있다.
정전의 전면에는 길게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든 동서 109m, 남북 69m의 넓은 월대를 조성했으며
그 가운데에는 정전의 신실로 통하는 신로(神路)가 남북으로 나 있어
사묘 건축으로서의 품위와 장중함을 나타낸다.
정전 건물 전체의 모습은 일자형으로 우리나라 단일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로서,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신주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왕과 황제 19위와 왕비와
황후 30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후 공사 중인 정전의 모습을 보면서 왕의 이름 뒤에
붙는 종/조는 묘호이며 종묘 안에는 묘호가 없는 왕(광해군, 연산군)을 제외한
모든 왕의 신주가 모셔져 있으며,조선이 생각보다 오래돼서 왕이 많아져
4칸씩 계속 증축을 거듭했다는 정보도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현재 정전은 보수 공사 중이였는데, 2025년 4월 21일까지 공사가
예정되어져 있다고 합니다. 2020년부터 시작된 공사인데, 워낙 큰 건물이고,
역사적 고증을 통해서 재건되다보니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았습니다.
공신당(功臣堂)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면 동쪽에 자리한 정면 16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시간이 흐르면서 정전이 증축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신당 또한 증축된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국가와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임금의 생존시에 공로가 큰 신하들의 신위를 해당
임금의 묘정에 배향했는데, 제1대 태조의 공신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을 시작으로
제27대 순종의 공신 효문공(孝文公) 서정순(徐正淳)까지
모두 제왕 19위에 공신 83위의 위패가 모셔졌다.
칠사당
정전 담장 안에 있는 3칸 짜리 작은 건물이다. '칠사'란 궁중의 신인 사명,
출입을 관장하는 호, 음식을 관장하는 주, 도성의 문을 관장하는 신령인 국문,
상벌을 주관하는 태여, 도로의 행작을 관장하는 국행, 그리고 중류에 대한 제사를 의미한다.
측면과 후면은 전으로 벽을 쌓고, 전면 중앙의 칸에는 판문을,
양옆 칸에는 격차창을 설치하였다.
남문을 나와서
정전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돌아가면 영년전이 보인다.
영녕전(永寧殿) : 조선 태조의 선대 4조 및 종묘의 정전에 봉안되지 않은 조선 역대 왕과
그 비(妃)의 신위(神位)를 모신 곳.
영녕전으로 가는길에 녹음진 모습은 상쾌하고 호젓했다.
악공청(樂工廳)
종묘제례시에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준비, 연습하고 대기하는 곳.
정전과 영녕전 바깥 서남쪽에 각각 있다. 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현재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으며 문짝 없이 기둥만 남아있다.
영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현재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전의
악공청보다 규모가 작은 편.
궁릉유적본부에서 가저온 사진
영녕전(永寧殿)은 1421년 세종 때 새로 지은 별묘(別廟)인데,
'영녕'은 '왕실 조상과 자손이 함께 평안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옮겨온 왕과 황제 15위와 왕비와 황후 17위,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영친왕)와 황태자비(이방자 여사)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세종3년(1421년) 정종의 신주를 모실 태실이 부족하여 창건.
처음에는 태실4칸 협실 좌우 각 1칸 창건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것을 광해군1608년 중건.
그 후 현종과 헌종 때 계속 증설하여 오늘에 이른다.
양녕전은
신실 하나하나의 구성은 정전과 다름이 없지만 정전보다 약간 작다.
영녕전 구조는 가운데 4칸이 태조의 4대 조상을 모신 곳으로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영녕전은 창문이 없는데 이는 어둠 속에서 편안히 계시라는 뜻이라 한다.
신로는 걸어 다니지 말라고 경고 팻말을 세워 놨다.
.
가운데의 높은 길인 신향로(神香路)는 신의 길인 신로(神路)와 향(香)·축(祝)·폐(幣)를 들여오는
향로(香路)가 합쳐진 길이며, 왼편은 세자의 길(世子路), 오른편은 왕의 길(御路)이다.
왼편이 오른편보다 상석이나 신이 바라보는 시선을 따랐다.
신로와 어로는 각각 역대 왕실의 신주를 모신 정전(正殿)의 신문과 어숙실(御肅室)이라고도
불리는 재궁(齋宮)의 남문을 향한다. 신은 정전 안 월대(月臺)의 신로를 따른다.
왕과 세자는 어숙실에서 목욕재개 후 제례를 위한 준비를 한다. 다시 서협문(西夾門)을
나서서는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서 신들과 만나 제를 진행한다.
길은 제를 맞는 마음의 자세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듯하다.
종묘의 문화는 중국을 따랐지만 정전과 영녕전의 건축 양식은 독창적이다.
우리만의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될 만큼 가치가 탁월하다. 간결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다.
수직이 아닌 수평을 지향한다. 땅과 나란하므로 안정감이 있다.
날 수 없는 사람의 걸음은 늘 수평과 친숙하다.
느릿하게 걸으며 시간을 가로질러 눈으로 건네는 대화들.
왕이 사라진 시대에 옛 임금은 말없이 인자하다.
하지만 단으로 이루어지므로 신전의 위엄을 잃지 않는다.
한편, 원래 종묘는 궁궐(창덕궁, 창경궁)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궁궐과 종묘 사이로 도로가 나면서 끊기게 되었고,
현재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