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10. 23:19ㆍ역사 탐방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무덤으로,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어 쌍릉이라고 부른다. 사적 제87호이다.
무덤 안의 구조는 백제 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며, 무덤의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의 것을 대왕묘라 하고, 남쪽의 작은 것을 소왕묘라고 부른다. 크기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2기 모두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다. 1917년 조사할 당시 무덤은 이미 도굴이 되어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대왕묘 안에서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 발견되어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무관은 바닥면보다 위쪽 면이 약간 넓고, 뚜껑의 윗면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관고리에는 8쪽의 꽃잎을 가진 연꽃무늬가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이들 두 고분은 1917년 일본인 학자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발굴된 바 있으나, 정확한 정보를 남기지 않아 고분의 구조나 성격을 밝히기 위한 학술발굴조사가 2018년(대왕릉)과 2019년(소왕릉)에 실시되었다. 학술발굴조사 결과, 대왕릉의 경우는 사비기 백제왕릉급 무덤으로서 판축 기법을 사용한 봉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석실 끝부분에서는 여태까지 그 존재가 알려진 바 없던 인골 조각이 발견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밀분석 결과 인골추정 나이가 무왕의 사망 나이와 비슷함에 따라 무왕의 무덤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소왕릉의 경우에는 적극적인 자료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무왕릉과 마찬가지로 석실의 규모와 품격에 있어 왕릉급임을 확인하였다. / 다음백과



좌 < 소왕릉 > 우 < 대왕릉 >


소왕릉
소왕릉 일제강점기에 조사되어 돌방은 대왕릉과 구조가 거의 같은데, 분구와 돌방 모두 대왕릉에 비해
작은 편이라는 점만 지적되었다. 2019년에 재발굴 조사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소왕릉은 남쪽으로 약간 경사진 능선에 자리하는데, 봉분 주위에는 넓게 성토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이 묘역의 남쪽 낮은 부분에만 잘 다듬은 널돌을 활 모양으로 20여 m 돌려 놓았다.
이 널돌은 무덤길을 흙으로 메운 후 돌려 세웠다. 따라서 널돌 열의 성격은 봉분의 둘레돌보다는
성토 묘역의 경계 시설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소왕릉은 성토 묘역과 봉분의 2단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대왕릉
대왕릉은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바 있으나 2018년에 이루어진 재조사로
여러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봉분은 점질토와 사질토를 10~15㎝ 내외 두께로 번갈아 성토하였는데,
다진 상태가 익산제석사지 목탑의 기단에 버금갈 만큼 정교하다.
현재 남아 있는 원 모양의 봉토 높이는 약 380㎝ 정도이다. 백제 사비기 돌방무덤에서
이렇게 봉분이 지상으로 높게 솟은 사례는 매우 드물다.

대왕릉에서 출토된 나무 널. 국립익산박물관 소장.

부여 능산리 왕릉군에 비해 익산쌍릉은 더 큰 돌방이 매장 시설로 사용되었다.
정교하게 재단하고 다듬은 석재를 이용하여 백제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돌방을 만든 점은
대왕릉이 백제 최상위 계층, 즉 왕의 무덤이었음을 증언한다.
대왕릉에서 출토된 나무널도 무령왕릉 이후 왕릉에만 사용하는 금송으로 만들어졌다.
금송은 왜의 특산물이다. 왜에서도 이용에 규제가 따른 금송을 백제 왕권이 다량으로 입수하고
독점적으로 이용한 체제가 존재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익산쌍릉(대왕릉) 피장자의 신분은 왕족임이 분명하다.
익산쌍릉은 묘 · 장제뿐만 아니라 옥장신구와 같은 껴묻거리, 사람 뼈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
그리고 익산과 무왕의 관계를 통해서도 무왕과 그 비의 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