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22. 23:14ㆍ역사 탐방
10월 2일 ; 역사 탐방 시간에 우리가 수업하는 강당이 노인의 날 행사로 자리를 비워주는
바람에 수업 시간에 갔던 < 용양봉 저정 > 수강생이 너무 많아서 인원을 늘리는 바람에
강의실이 좁아 강당에서 수업을 한다. 9호선 노들역 3번 출구에서 만나 올라간 곳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궁궐이 있는 한양에서 현륭원이 있는 수원으로 오가는 길목에는 한강이 있다.
다만, 단순한 휴식처로만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양에서 수원으로 갈 때는 쉬면서 행렬을
용양봉저정의 위치는노들나루루 바로 앞이다.조선 시대 에 노들나루는 그야말로 교통의 요지였다.

위, 아래의 사진은 노들 역사 벽면에 용양봉저정의
그림들과 글을 새겨 놓았다.



배다리의 모습.



정면 6칸, 측면 2칸. 1972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고 양쪽에 툇간을 두었고, 사방에는 띠살분합문을 달았고,
이중량(二重樑)을 둔 오량구조, 겹처마집으로 간소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현재 노량진 수원지 건너편 작은 언덕에 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 때마다 노들강(지금의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가설하여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게 하고 쉴 자리가 필요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 한다.
축조연대는 1789년(정조 13) 이후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처음에는 정문과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용양봉저정만 남아 있다.




옆에서 보면 앞쪽 한 칸은 툇마루이고 뒷쪽의 가운데 네 칸에는 우물마루가 깔려있습니다.
내부는 낮은 문지방이 설치된 좌측 2칸은 원래 온돌방이었고, 높다란 머름이 설치된 우측 2칸은
마루로 꾸몄으나 지금은 온돌방은 사라지고 모두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로만 되어 있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세 벽면에 반차도와 용양봉저정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열심히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친구가 전화하면 공부한다하고
우리 끼리는 바람 쐬고 놀러간다고 말하라며 노인들을 편하게 해주신다. ㅎㅎ
딱 맞는 말이다. 돌아서면 잊어 버리는것은.


1795년 화성행차 일정
정조는 재위 24년(1776~1800)간 총 66회의 행차 중 현륭원 참배행행이 13회인데, 그 중 을묘원행(乙卯園幸, 1795)이 가장 장중하고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겉으로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해 어머님의 한을 풀어드리는 효성의 발현이나 내면에는 재위 20년간의 위엄을 떨쳐 충성을 집결시키고, 정치개혁의 박차를 가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역연한 시위적 행차였다.
▶ 첫째날-1795년 윤 2월 9일
- 정조는 새벽 6시 45분경 창덕궁(昌德宮)을 떠나 돈화문(敦化門)에서 혜경궁(어머니)를 맞아 말을 타고 출발하고, 그 뒤를 채제공을 비롯해1,779명이 배종(陪從)하다.
- 노량진에 가설된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은 행차는 11시 30분경 출발, 장승배기를 거쳐 시흥 행궁에서 하룻밤을 묵다.
▶ 둘째날-1795년 윤 2월 10일
- 새벽 6시 45분경 시흥행궁을 떠나 지금의 시흥대로를 거쳐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먹고, 비를 염려하여 서둘러 화성을 향하다.
(시흥행궁을 떠난 행렬은 안양 만안교를 건너 안양행궁에서 혜경궁에게 미음을 올린 후 사근참행궁으로 출발)
- 행차가 지지대 고개를 넘어 진목정에서 휴식하는 동안 정조는 갑주(甲胄, 갑옷과 투구)로 갈아 입고 장신과 유수, 장졸들이 길가에 부복한 장안문을 거쳐 화성행궁에 도착하여 암행어사에게 정례의 엄격과 월권 단속을 당부한다.
▶ 셋째날-1795년 윤 2월 11일
- 새벽 4시 45분경 화성행궁을 떠난 정조는 팔달산 기슭에 있는 화성향교 대성전에 전배(展拜)하고, 향교가 꼴이 아니라며 전면 수리를 명하다.
- 진시(오전 7~9시)에 행궁 옆 낙남관에서 문·무과 별시가 시행되어 화성, 광주, 시릉, 과천 4읍 초시 합격한 116명 중 61명을 선발했다.
- 정조는 신시(오후 3~6시)에 봉수당에서 회갑잔치 예행연습을 참관하여 의절과 성대함을 강조하여 여령들에게 시상하다.
▶ 넷째날-1795년 윤 2월 12일
- 새벽 4시 40분경 혜경궁을 모시고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 원상에 올라 전배(展拜)하고, 어머니 혜경궁의 비통함이 절도를 넘어서자 서둘러 귀환하다.
- 정조는 오후 4시 15분 갑주(甲胄 :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팔달산 서장대에 올라 성조(수성훈련)을 명하자 3,700명 장졸의 함성과 포성이 진동하다.
횃불을 사용한 야간훈련도 참관한 정조는 궁시와 초목을 내려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하다.
▶ 다섯째날-1795년 윤 2월 13일
- 오전 8시 30분 진찬례(進饌禮, 회갑잔치)가 준비된 봉수당에 주인공인 혜경궁을 모시고, 정조가 좌정하자 여민락이 연주되는 가운데 내외 명부, 의빈, 척신이 절한 후 정조가 배(拜)하자 음식상이 올려졌다.
- 혜경궁이 정조가 올린 술잔을 마시자 모두 천천세를 연호하며 춤과 음악이 이어지고 잔치가 흥겨웠다.
▶ 여섯째날-1795년 윤 2월 14일
- 새벽 5시부터 화성 네곳에서 어려운 주민 5,352명에게 쌀과 소금을 나누어 주고 따뜻한 죽을 주는 시혜의 날이다.
정조가 5시 35분 신풍루에 나가 나누어 줄것을 살피고 자은(慈恩)의 뜻을 교시하다.
- 정조는 8시 15분 양로연을 열 낙남헌에 가 384명의 노인을 접대하고, 비단과 지팡이를 하사하자 노인들은 춤추며 천세를 외치다.
- 11시경 정조는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방화수류정에 올라 자신이 설계한 성곽을 자세히 살피며 성제(城制)를 논하다.
- 오후 3시경부터 득중정에서 대신들과 활쏘기를 했는데 정조는 과녁에 적중시키며, 무예를 과시하고 야간 활쏘기도 시행하다.
▶ 일곱째날-1795년 윤 2월 15일
- 오전 8시 45분경 귀환길에 올라 장안문에서 꽃모자 쓴 무동을 대동한 문무 별시 합격자들의 환송을 받고 미륵현을 넘기 싫다며 <지지대(遲遲臺)>를 명하다.
- 점심 무렵 사근평 행궁에서 광주, 시흥, 과천 수령을 인견하고 읍폐, 민고를 하문하고, 저녁 무렵 시흥 행둥에 도착하다.
▶ 여덟째날-1795년 윤 2월 16일
- 새벽 6시 45분 시흥을 떠난 정조는 문성동 앞길에서 시흥주민과 직접 대화하고, 시흥민의 환곡을 감탕하다.
-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고 배다리를 건너 주교당상에게 배다리 해체를 신속히 하여 조운에 지장없게 하라 명하고 환궁하
였다.





두 필의 말이 앞뒤에서 끄는 쌍마교(雙馬轎)는 정조임금의 정가교(正駕轎)입니다.
정가교 앞쪽에 비어있는 네 필의 정조교마(正祖轎馬)가 정조를 암시하고,
왕의 상징인 교룡기(交龍旗)와 둑을 위시한 각종 의장물의 호위를 받으며 지나갑니다.


노량주교도섭도(용양봉저정 모습)
13회의 화성 능행 중 가장 장엄했던 을묘원행(1795)을 담은 <정조능행도> 8폭 병풍 중
노량주교섭도 상단에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뜻의 용양봉저정 그림이다.
지금은 정자 한 채만 남아있지만 1791년 준공 당시는 상당한 부속 건물을
갖춘 규모있는 행궁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버들이 늘어서 있고 도진촌(渡津村)이 들어 앉은 노들나루(鷺梁津, 노량진)의 전경과
하얀꽃이 만발한 동산과 강변에 정조의 행차를 구경 나온 군중의 모습이 생생하다.



주교사터(舟橋司址)
주교사는 임금이 행차할 때 한강에 부교(浮橋)를 놓는 일과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의 조운(漕運)을 맡아 보던 조선시대의 관아(官衙)이다.
정조 13년(1789)에 설치 되었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된 후
업무가 금위영(禁衛營)에 이관되었다.
' 용양봉저장 '을 내려오며 큰 길가에 세운 주교사터 표지석을 보고
노량진 쪽으로 올라서서 가다 보면 한강을 방어하다 전사한 분들을 기념하는 기념탑과
추모비를 볼 수 있다.

6.25전쟁 때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전사하신 분들의 명비와 기념비.


아쉽게도 큰길을 비켜 외진 곳에 이정표도 없이 세워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없어 희생자들의 영혼이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노량진역 쪽으로 걸어 가다 보면 길 옆에 세워진 기념비에 백촌김문기선생이
사육신으로 판결이 났다고 기념비를 세운 것이 보인다.


사육신 묘를 왔을 답사 왔을 때 한 분이 더 추가되었다고 하신 백촌김문기선생을
사육신으로 판정한다는 결의문. 몰랐던 사실도 알게된 분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얼마전까지 정수장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다니다가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쉴 수도 있는 의자 역활을 하는 곳인가 보다.
노량진 한쪽에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 고등학교 때 부터 서울에서 살았어도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새삼 생각해보니 아는 곳이 별로 없다.
어느 불로그에서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서울을 알기 위해 곳곳을 찾아 다닌다고하는
글을 보았는데 작정하고 다니지 않으면 그저 내가 가는 곳이 한정되어 있어
서울에 살아도 서울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