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의 스승이었던 운곡 원천석

2026. 6. 21. 21:53역사 탐방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이자 문인.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출세를 단념한 채 한 번도 관계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은사로 지냈다. 대표작으로 <운곡시사>가 있다.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원주 아전층의 후손으로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이다.

 

군적에 등록될 처지가 되자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진사에 합격했다.

그는 이방원(뒤의 태종)의 스승을 지낸 적이 있어 태종이 즉위 후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치악산에 있는 그의 집으로 친히 찾아와도 자리를 피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야 백의(白衣)를 입고 서울로 와 태종을 만났다고 한다.

비록 향촌에 있었으나 여말선초의 격변하는 시국을 개탄하며 현실을 증언하려 했다.

만년에 야사를 저술해 궤 속에 넣은 뒤 남에게 보이지 않고 가묘에 보관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증손대에 와서 사당에 시사(時祀)를 지낸 뒤 궤를 열어 그 글을 읽어보았는데,

멸족(滅族)의 화를 가져올 것이라 하여 불태웠다고 한다.

문집으로는 〈운곡시사 耘谷詩史〉 전한다. 이 문집은 왕조 교체기의 역사적 사실과

그에 관한 소감 등을 1,000수가 넘는 시로 읊은 것으로 제목도 '시사'라 했다.

야사는 없어졌으나 이 시가 하나의 증언으로 남아 있어 후세의 사가들은 모두 원천석의 증언을 따랐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로 시작하는 고려왕조를 회고하는 시조 1수가 전한다.

 

 

 

창의사는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행구동에 있다.

2008년 4월 23일 원주시의 향토문화유산 제2008-2호로 지정되었다.

 

창의사 

창의사는 고려말, 조선초기의 문인이며 조선 태종의 스승이기도한

운곡 원천석을 모신 사당이다.

운곡 원천석 선생은 고려말 정권이 바뀌는 어지러운 상황에서

치악산 자락에 은둔하며 충의를 지킨분이다.

 

 

 

                        운곡시사.

 

위치문화재 지정

강원도 기념물 제75호(2000.11.18 지정)

 

운곡 원천석(1330~) 선생의 묘이다.

고려말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를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조선왕조가 들어서 선생에게 벼슬이 주어지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켜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의 묘역 내에는 봉분 앞에 묘비와 제사음식을 차려 놓을 수 있는 상석(床石)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신도비가 있는 소박한 형태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운석 원천석 부인의 묘.

 

 

 

 운곡 원천석 부인 묘와 마주 보이는 언덕에 원천석 묘가 보인다.

 

 

 

 

 

 

 

 

 

 

 

 

이것으로 원주 답사는 아쉽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