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6. 16:32ㆍ우리나라 이곳저곳
외곽순환도로를 타려면 지나가는 길에 있는 "영회원" 늘 궁금했지만
지나는 길에 일부러 가 지지를 않았었다.
오늘은 , 시간이 있어 궁금하니 들렀다가자고 남편에게 부탁했다.
경기도 광명시 노은사동산141-20 , 국가 사적 357
영회원 들어 가는 입구에는 애기능이라는 저수지가 있고 비포장 도로로
농원을 지나며 꾸불꾸불 들어가다 보면 능 들어가는 입구에 400년이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능 입구가 어수선하고 정리가 안된, 농장에서 사용하는 허물어진 건물들이 있어 지저분하고 살아서도 슬픈 운명으로 살다간
세자빈의 사후도 안스럽기도 하고 철책으로 막혀져 갇혀지내는 듯한 안스러움이 배어져 나온다.
광명시에서 조금 신경을 썼으면 하는 안타까움에 아쉬움이 남는다.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의 온신초등학교에서 동남쪽으로 1.5km쯤 떨어진 곳에는 조선 제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 묘가 자리 잡았다.
이곳을 영회원이라 부르는 민회빈 강씨의 슬픈 사연이 전해온다.
조선 인조 때,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두 차례에 걸쳐 쳐들어 온 정묘· 병자호란의 난리를 겪었다.
이 난리에서 항복하게 된 인조는 청나라의 요구대로 소현세자와 세자빈인 민회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 등, 왕자와 신하들을 인질로 보내기로 하였다.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 간 왕자 와 강빈(민회빈 강씨)은 낯선 땅에서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생활했다.
길고 긴 8년의 인질생활이 끝나갈 때 청나라 임금은 세자와 가족을 우리나라로 돌려보내기로 하고 위로잔치를 열었다.
이 잔치에서 임금 은“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생활하느라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이제 세자를 조선으로 돌려보내기로 했으니, 무엇이든 소원을 말하라. 한 가지의 소원은 내가 직접 들어 주리라”하였다.
이 말을 듣고 갑작스런 청나라 임금의 태도에 미 심쩍어 하던 소현세자는 “폐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돌보아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아끼시는 용연 벼루를 갖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좋다. 이 벼루는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나 그대에게 주리라.”
이리하여 고국을 떠난지 8년 만에 소현세자와 가족들은 귀국길에 올랐다. 꿈에도 그리던 세자가 돌아오자, 인조는 크게 기뻐하여 맞았다.
“내가 부족하여 너희를 지금껏 고생시켰구나. 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하며 세자를 위로하고 그동안의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청의 임금은 어떠하냐?”
“예, 저희가 돌아올 때 잔치를 베풀고 소원을 들어 주겠다 했습니다. 그 래서 저는 청의 임금이 가장 아끼는 용연이라는 벼루를 받아왔습니다.”
“예끼, 이 못난 놈아. 겨우 벼루를 달라 했더란 말이냐. 이 벼루나 받아라.”
벼루에 맞은 세자는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세자의 이마 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세자는 이후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세 상을 떠나고 말았다. 볼모로 끌려 간 청에서의 8년 세월, 돌아온 내 나 라에서 하늘처럼 믿었던 남편의 죽음, 강빈은 가슴을 저미는 슬픔의 세월을 살게 되었고 말 수도 점점 줄어갔다.
그러자 궁궐에서는 강빈을 시기하는 일 이 생겼다. 인조의 귀여움을 받은 조귀인 이 그를 모함하였다.
“민회빈이 저를 죽이려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저주한다 하더이다.”
“세자가 죽은일로 임금님을 원망한다 하더이다.”
이 같은 소문이 꼬리를 잇자, 인조는 민회빈 강씨에게 벌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민회빈을 궁궐에서 (인조23년. 1645) 내어 쫓고 서민으 로 삼아라.”
“민회빈에 사약을 내려 죽이도록 하라.”
“세자의 자식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 세 상과 멀리하게 하라.”
민회빈은 사약을 받고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세자와의 사랑, 볼모로 끌려 간 청에서의 8년 세월, 그리고 자식들과의 슬픈 이별들의 생각으로 강빈은 가슴이 떨리는 설움을 참으며 말했다.
“살아서 효를 다하는 것도 자식의 도리이옵고, 부모가 죽으라 하면 그 뜻에 따르는 것도 효이오니 기꺼이 사약을 받겠습니다.”
강빈은 억울함과 슬픔을 안은 채 젊은 나이로 슬픈 삶을 마쳤다. 이후 숙종(44년) 때에 이르러 세자빈 강씨의 결백함이 밝혀져 다시 민회빈으로 복위되고,
고종 (7년 1870) 때 묘소를 영회원이라 칭하였다.(펌) 비석과 정자각은 남아 있지 않다.
누군가가 갖다 놓은 꽃다발은 후손들이었을까?
웬지 가슴이 아려온다. 질투와 권력의 희생물이 된 세자빈의 억울한 죽음이...
'우리나라 이곳저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남미문화원 (0) | 2012.06.23 |
---|---|
임진각 평화 누리공원 20606 (0) | 2012.06.07 |
고성 상리 연꽃 공원 (0) | 2012.05.15 |
충렬사 (0) | 2012.05.12 |
통영 미륵산 (0) | 2012.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