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은 시(161)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도종환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
2023.03.02 -
2월
유유님의 사진 2월 / 이외수 도시의 트럭들은 날마다 살해당한 감성의 낱말들을 쓰레기 하치장으로 실어나른다 내가 사랑하는 낱말들은 지명수배 상태로 지하실에 은둔해 있다 봄이 오고 있다는 예감 때문에 날마다 그대에게 엽서를 쓴다 세월이 그리움을 매장할 수는 없다 밤이면 선잠결에 그대가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 소스라쳐 문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뜬눈으로 정박해 있는 도시 진눈깨비만 시린 눈썹을 적시고 있다
2023.02.07 -
설날 아침
설날 아침 -이해인 詩- 햇빛 한 접시 떡국 한 그릇에 나이 한 살 더 먹고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아빠도 엄마도 하늘에 가고 안 계신 이 세상 우리 집은 어디일까요 일 년 내내 꼬까옷 입고 살 줄 알았던 어린 시절 그 집으로 다시 가고 싶네요 식구들 모두 패랭이꽃처럼 환히 웃던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네요 *펴낸 곳: 분도출판사 *1993년 5월 15일 초판 *이해인 기도 모음[사계절의 기도] 1월의 시 / 정성수 친구여 최초의 새해가 왔다. 이제 날 저무는 주점에 앉아 쓸쓸한 추억을 슬퍼하지 말자. 잊을 수 없으므로 잊기로 하자. 이미 죽었다. 저 설레이던 우리들의 젊은 날 한마디 유언도 없이 시간 너머로 사라졌다. 스스로 거역할 수 없었던 돌풍과 해일의 시절 소리 없는 통곡과 죽음 앞에..
2023.01.21 -
행복
행복 나태주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2023.01.18 -
겨울비는 내리는데..
당신의 외투 김인수 비가 내리면 내 마음은 창밖을 향합니다. 처마 밑에서 떨고 있을 당신이 보입니다. 비가 내리면 문을 반쯤 열어 놓고 당신을 맞이할 따듯한 차를 준비합니다. 창문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당신 목소리 같습니다. 비가 내리면 내 마음은 조급해집니다. 두툼한 당신 외투 챙기고 내 영혼의 등불 밝히면서 당신이 돌아오실 동네 어귀에 나갑니다. 비가 내리는 지금 당신은 어느 곳에 잠 드셨는지 당신을 기다리는 외투를 입지 않으시네요. 온기 빠진 당신의 외투는 장승 위에 걸쳐 흐날리고 당신 빈 자리에는 빗물만 고이네요. 김인수 시인은 에서 "부서진 라일락"이라는 작품으로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는 현재 AMG KOREA 대표이사 와 유한양행 OB모임 유우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2.12.06 -
11월의 시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을 비우고 홀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도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2022.10.21